역대 대형사고 처벌 살펴보니

'몸통' 두고, '꼬리'만 잘랐다

2015-04-28 10:58:02 게재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이래 최근까지 대형사고가 잇따랐지만 책임자는 면책하고 실무자만 처벌하는 '꼬리자르기'가 계속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이 기업조직에 책임을 묻거나, 책임 있는 정부 관료를 처벌하지 못하는 만큼 '기업살인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박상은 세월호국민대책위 존엄안전위원회 위원은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업책임법(기업살인법) 제정 미룰 수 없다' 토론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위원은 서해 훼리호 침몰에서 오룡호 침몰까지 역대 대형사고 이후 책임자 처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분석했다.

1995년 6월 29일 붕괴돼 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삼풍백화점의 모습. 연합뉴스


◆아무리 많이 죽어도 '업무상 과실치사' = 과적·과승으로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 훼리호(1993년)는 위도-부안을 운항하는 선박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정부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운항횟수를 늘려 달라는 요구를 묵살했다.

국가의 책임이 제기되는 대목이지만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당시 군산해운항만청 계장과 ㈜서해훼리 상무가 선박검사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으나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32명 사망)는 내부 결함과 점검 부실이 원인이었다. 부실시공에 대한 책임은 시공사였던 동아건설이, 점검 부실에 대한 책임은 서울시에게 있었다. 특히 서울시는 사고 직전 교량 이음새가 벌어지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아건설에서는 현장소장이 금고 2년, 서울시에서는 동부건설사업소장이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외에 서울시 공사감독관 등 공무원과 동아건설 간부 14명은 집행유예를 받고 끝났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502명 사망)는 총체적 부실시공이었다. 경영진도 세월호 승무원들처럼 붕괴 조짐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영업 중단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 붕괴 직전에 빠져나왔다. 당시 이들에 대해서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검토됐지만 결국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됐다.

다만 소유주인 고 이준 전 회장에 대해서는 사고와 무관하게 추가로 횡령·뇌물공여 등이 적용돼 징역 7년 6월, 차남에 대해서는 7년 징역형이 확정됐다. 이외에 보상재원 마련을 위해 이준 회장 일가의 재산 500여억원을 모두 압류했고 삼풍그룹은 해체됐다.

기업의 최고 경영진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처벌된 유일한 사례다.

◆참사책임, 공무원은 '솜방방이' = 1999년 화재로 23명의 사망자를 낸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은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아서 만들어 화재에 취약하고, 소방시설도 전혀 갖추지 않았음에도 경기도 화성군은 불법적으로 허가를 내줬다. 이에 따라 화성군 공무원들이 직권남용과 업무상 중과실 치사상, 건축법 위반 등으로 기소됐지만 4명은 무죄, 2명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씨랜드 대표(건물주)는 건축법 및 소방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서울 소망유치원 원장과 교사 등 4명은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2명의 사망자를 낸 대구 지하철 화재의 경우 처벌이 기관사와 관제사에 몰렸다. 이들은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관사는 금고 5년,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받은 관제사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에서 1년 6월이 선고됐다.

그러나 매뉴얼 부실과 1인 승무 시스템, 그리고 부실한 지하철 방재시설로 참사의 근본원인을 만든 대구지하철공사는 사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시 공사 사장과 시설부장이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됐다가 그마저 무죄를 선고받았다.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사고(2013년)도 모든 책임은 해병대 캠프 프로그램을 운영한 하청업체가 졌다. 해병대캠프 대표가 업무상과실치사로 금고 1년 6월, 교관 3명도 같은 죄목으로 2년~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유스호스텔 대표와 코오롱트래블 대표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스호스텔 대표는 수상레저안전법 위반으로 1심과 항소심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태안군청과 해경의 허술한 관리감독이 도마에 올랐지만 경찰은 시간과 인원부족을 이유로 수사선상에서 아예 제외했다.

세월호참사 2개월 전 214명의 사상자를 낸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도 다를 바 없었다. 체육관 설계·시공·감리·관리 책임자 13명에겐 업무상 과실치사가 적용됐지만 시공사인 코오롱건설 관계자와 리조트 대표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처벌받은 13명 가운데 10명은 하청업체와 건축사 등이고 3명은 리조트 임직원이었다.

세월호참사의 경우 유병언 전 회장 일가와 측근 40여명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직접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반이상이 집행유예를 받거나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선박의 안전조치를 방기하고 위험을 조장한 것이 청해진해운의 경영전략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현행법상으로는 청해진해운이에 대해 재해사고에 관한 형사책임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들은 사고로 인한 기름유출이 해양환경법위반이기 때문에 양벌규정으로 인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기업과 최고책임자 처벌할 수 있어야" =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법상 기업의 잘못으로 안전사고가 발생했더라도 회사 임직원 개인이 아닌 기업(법인)은 벌금형 처벌에만 그치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양심과 정신을 갖지 못한 법인(기업)은 죄를 범하지 못한다'는 게 우리나라 형사법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대형 화재나 건물 붕괴 사고, 선박·철도 사고 등이 일어나더라도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 '선박법' 등 개별법에 명시된 벌칙 조항(양벌규정)에 의해서만 기업은 처벌된다. 그것도 임직원 개인에 대한 기업의 감독 소홀 책임이 입증될 때만 처벌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처벌로 인한 불이익보다 안전조치 불이행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막대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형사처벌 방식으로는 기업의 안전의무이행을 담보하는 예방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은 물론이고 철도와 버스, 선박, 항공기, 위험물 제조·취급 업소, 다중이용시설 등에서 노동자나 일반 시민들이 생명과 신체상의 피해를 입을 경우 기업과 최고경영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책임법(기업살인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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