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물 전락한 증권집단소송제│① 투자자 보호는 먼 길

'사실상 6심제' 소송허가 기다리다 지쳐

2015-10-20 12:02:30 게재

허가 결정 있어야 본안심리 … 2010년 이후 제기된 6건 모두 1심서 멈춰

대우조선해양 소액투자자들은 지난달 분식회계 혐의로 대우조선해양과 외부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투자자들은 집단소송을 제기하려다 포기했다. 증권집단소송 요건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소송허가를 받기까지 3심을 거쳐야 하고 본안 재판에서 판단을 받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2건에 대해 대법원이 집단소송허가 취지로 결정을 내렸지만 파기환송심인 서울고법은 6개월이 지나도록 1건에 대해서는 심리기일조차 잡지 않고 있다. 대법원이 이미 주요 쟁점에 대해 판단을 끝낸 파기환송심 사건은 재판부가 빨리 처리하는 게 통상적이지만 집단소송 처리에는 부담을 느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건 모두 ELS종가조작혐의 사건으로 로얄 뱅크오브 캐나다(RBC)사건은 5년, 도이치뱅크 아게를 상대로 한 사건은 3년이 지났다.

집단소송에 관여하고 있는 한 변호사는 "소송허가를 받는 데만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고 대법원이 판단한 사건도 파기환송심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며 "신중한 게 아니라 피해자 구제를 외면하는 늑장 판단"이라고 말했다.

소송허가 결정, 단심제로 끝내야 = 이 때문에 소송허가 절차를 제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무부가 만든 집단소송법 초안과 지난 98년에 제출된 증권관련집단소송법안에는 1심 법원의 허가 결정에 불복할 수 없고 불허가 결정에 대해서만 불복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항고의 권한을 소액투자자에게만 준 것이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항고할 수 있는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소송허가절차는 '시간끌기용'으로 전락했다.

조보현 변호사는 "6심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법원이 소송허가를 하면 본안 재판을 진행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송허가결정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본안 재판은 모두 1심에서 멈춰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변호사들도 집단소송의 원고(투자자)측 소송대리를 꺼리고 있다. 그동안 진행돼 온 7건 중 5건의 원고측 소송대리는 법무법인 한누리에서 맡고 있다.

지난 2013년 진매트리스의 시세조정혐의 집단소송에 법무법인 건진, 법무법인 율이 참여하기 전까지 하누리가 유일했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 사기성 상품 발행혐의를 받고 있는 유안타증권(구 동양증권)을 상대로 지난해 제기된 집단소송은 법무법인 정률이 맡았다.

최근 1~2년 사이에 제기된 사건을 제외하면 법무법인 한누리가 5년 이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한누리는 증권관련 불법행위 소송에서 원고소송 전문로펌을 표방하고 있다.

한누리 관계자는 "상당한 인력과 오랜 시간이 투여되는 집단소송의 투자자측 소송대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매년 비용이 들어가지만 한참 후에 수익이 나오고 수익 발생 여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패소자 소송비용부담에 대표당사자 지원 꺼려 = 또 다른 문제는 투자자들이 대표당사자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현행 법률은 소송비용 패소자부담원칙을 정하고 있다. 증권집단소송은 소송비용이 많이 소요돼 소액투자자가 소송에 나섰다가 패소하면 가혹한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특히 원고를 대표하는 대표당사자는 자신이 청구한 청구금액을 넘어서 전체 구성원의 청구금액에 따라 거액의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집단소송 대표당사자로 나서기를 꺼려한다.

법무법인 한누리도 집단소송을 진행하면서 대표당사자로 나서는 투자자와 '패소할 경우 소송비용부담을 법무법인이 부담'하는 별도의 약정을 맺고 있다. 전문가들은 민사소송법의 소송비용 패소자부담원칙에도 불구하고 집단소송에 한해서는 대표당사자만 부담하는 게 아니라 원고들 각자에게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두차례 개정안 발의됐지만 … = 박근혜 정부에서 증권관련집단소송법 개정안은 두 차례 발의됐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013년 9월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박 대통령의 공약 내용을 담고 있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 외에 공정거래 관련 집단소송을 도입하고 집단소송 대표당사자 또는 소송대리인의 제한 사유를 완화하는 등의 내용이다.

해당 개정안은 지난해 2월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라갔지만 당시 황교안 법무장관(현 국무총리)은 "집단적 피해가 발생하는 부당한 공동행위와 재판매가격유지행위에 대해 실질적 구제를 꾀하자는 개정 취지에는 공감이 된다"면서도 "집단소송제도에 대해서는 소액다수 피해자의 효율적 구제라는 장점과 함께 소송의 남용 우려라는 단점도 지적되고 있다는 점,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도입에 소극적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해당 개정안에 대한 국회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1월 증권집단소송대상을 비상장법인으로 확대하는 등의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하지만 지난 6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김주현 법무부 차관은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집단적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하는 방안으로 판단되지만 모든 비상장법인에 대해 집단소송을 허용할 경우 기업의 경제활동을 지나치게 위축시킬 우려는 없는지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단소송제도 = 집단소송제도는 소비자(피해자) 한명이 기업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동일한 사안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이 추가 소송 없이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다. 2005년 국내에 도입된 증권집단소송제도는 소송의 대상을 기업의 주가조작과 허위공시, 분식회계 등으로 제한한 것으로 소액투자자가 기업 등을 상대로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관련기사]
- 증권집단소송, 10년간 7건뿐

['무용지물 전락한 증권집단소송제' 연재기사]
- [①투자자 보호는 먼 길] '사실상 6심제' 소송허가 기다리다 지쳐 2015-10-20
- [②실효성 떨어지는 법률] 법은 있지만 사실상 법조항이 소송 막아 2015-10-22
- [③해외에서는] 미국은 매년 평균 201건 증권집단소송 2015-10-27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이경기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