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나의 1988’

2015-12-27 19:32:01 게재

  드라마 열풍 때문인지 빛바랜 추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재미를 느껴보는 요즘입니다. 앞머리를 돌돌 말아 한껏 멋을 부리고, 한번쯤 소방차와 김완선 춤을 따라하던 학창 시절. 이불을 덮어쓰고 별밤을 듣던 풋풋했던 우리들은 어느덧 어른이 됐고, 부모가 됐습니다. 가끔 현실의 무게가 고단하고 피곤해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나이. 하지만 지나간 그 때 그 시절을 한번 기억해보세요. 부족했지만 마음은 풍족했고, 어렸지만 그래서 용기 충만했던 우리의 청춘. 故유재하 씨의 노랫말처럼 잘했건 못했건 간에 옛 추억이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1988년 그 즈음, 우리의 지난날을 장식했던 추억의 단편들을 꺼내어봅니다.

앞부분만 닳고 닳았던 추억의 ‘man to man'
 지금 아이들은 인터넷 강의, 원어민 회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익힐 수 있지만 그 시절 영어 공부의 정석은 ‘man to man'이었죠. 학원에서도 맨투맨 혹은 성문기본영어가 빠질 수 없었죠. 동사, 비동사, 전치사 등 문법 공부가 중요했던 시절이었죠. 마음먹고 공부한다고 형광펜으로 무지하게 줄을 그으며 외웠었는데 말이죠. 수학의 정석도 집합 부분만 새까만 것처럼 앞부분은 닳고 닳았는데 뒷부분은 거의 새 책으로 남아있던 맨투맨.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공부했나 싶기도 해요. 그래도 친구들과 머리 맞대면 공부하던 시절, 맨투맨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돼 저를 가끔 웃음 짓게 한답니다. 
일산동 고경희 씨 
 

1988년 그 해, 너무나 고생하신 우리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1988년. 우리 집안에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강원도에서 일을 보고 오시던 아버지가 자전거 운전자와 충돌, 상대방이 사망했죠. 아버지는 바로 구속됐어요. 어머니는 매일 과천에서 홍천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면회를 다니셨어요. 어린 저의 기억으론 새벽 3~4시에 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나가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오셨지요. 남편의 부재에 어린 우리 형제들을 돌보셔야 했던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어머니’가 맞더라고요. 지금도 그 때 어머니의 모습을 떠오르면 가슴 한 켠이 아려오곤 합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일산동 임건 씨


고무줄 파마에 대학생 흉내 내기, 드라마 속 덕선이가 바로 저예요.
제가 기억하는 1988년에는 고무줄 파마가 있죠. 머리를 땋아서 파마 약을 뿌리고 한참 놀다가 중화제를 뿌려요. 머리를 말리고 나면 부스스 폭탄머리로 변신하죠. 다음은 대학생 흉내 내기. 이것은 고난도의 화장술과 몸매를 지녀야 해요. 때론 시위 현장에 따라다니기도 했답니다.
창덕궁과 경복궁에서 반 미팅도 했어요. 남학교 학생들이랑 반 통째로 미팅하는 거죠. 주선자가 제비를 뽑거나 번호대로 짝을 정해서 놀았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선생님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다음날 불려가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았죠. 주선자의 정보로 가끔은 맘에 드는 아이의 번호를 몰래 따와서 우연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어요. 요즘 그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어요. 완전 제 얘기거든요.
중산동 이은정씨
 

친구들과 장난치며 난로에 넣을 장작 타러 가던 생각나요
저의 1988에 대한 기억이요? 아무래도 지금이 겨울이니까 학교 교실에서 난로를 피웠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나죠. 제가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매일 친구들과 신나게 난로에 넣을 장작을 타러 가던 생각도 나고, 난로 위에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을 얹어 두었던 일도 떠오르네요. 시린 손을 너무 난로 가까이에 댔다가 장갑 태워 먹었던 기억, 난로 안에 넣어둔 고구마가 익을 때 났던 구수한 냄새,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불 꺼진 난로 주위에 모여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엄청나게 크게 웃으며 나누었던 얘기들. 아~ 그때는 날씨가 지금보다 상당히 추웠을 것 같은데 왜 더 따뜻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풍동 영수 씨




여고시절 친구들아! 다들 잘 지내지~?
저 사진은 1988년 어느 봄날의 사진입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1학년이 되면 누구나 생활관에 입소를 했습니다. 1박2일 동안 한복을 입고 절하는 법을 배우며 마지막 날엔 부모님을 학교로 초청해 큰 절을 올리는 시간을 가졌지요.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나면 같은 반 친구들과 부모님, 선생님과 함께 저렇게 단체 사진을 찍었답니다. 그때는 한복을 입고 예절 수업을 받는 게 귀찮고 다리도 아팠던 것 같은데(큰 절을 여러 번 해야 해서) 지금 생각해보니 뜻 깊은 인성교육이 아니었나 싶어요. 혹시 사진 속 친구들 중 누군가가 이 사진을 보고 이때를 기억한다면 연락해라 친구들아.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네요.
대화동 박은경씨


달걀프라이가 올라가 있던 옛날 함박스테이크의 추억
얼마 전 ‘응팔’을 보다 덕선이와 친구들이 경양식집에서 ‘써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그때 덕선이가 입에 고기를 급하게 집어넣는 걸 보고 동룡이가 그랬나요. 너희들은 있는 집 자식이고  얘는 못 먹어봐서 그런 거라고요. 그 덕선이가 바로 저에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삼촌이 저를 명동의 경양식으로 데려갔는데 양식이라곤 그때 처음 맛보았죠. 그때의 함박스테이크는 햐~ 완전 맛의 신세계였어요. 불판에 올려 진 두툼하고 부드러운 고기에 소스가 듬뿍, 거기에 달걀프라이까지 떡 얹어져 나오는데 어떻게 입으로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아요. 지금도 그때 그 맛이 그리워 옛날식 함박스테이크 집을 찾아가보지만 그때처럼 미각이 황홀하진 않는 걸 보면 세월 따라 제 입맛이 변한 것이겠죠.
주엽동 김태훈씨




나들이의 추억, 반갑다 ‘포니’

포니 차가 생긴 후 저희 가족은 여기저기 나들이를 많이 다녔답니다. 당시 나들이는 어디 특별한 여행지를 간다기보다 김밥을 싸들고 뒷산이나 개울가를 찾아가 물고기도 잡고 노는 것이었죠. 사진 속 장소는 구파발 근처로 지금은 모두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랍니다. 응팔에 나오는 것처럼 날마다 차를 광내시던 아버지와 포니, 지금은 모두 그리움으로 남아 있네요.
대화마을 양수연씨


‘소방차’의 승마바지 따라 입던 그 때가 기억나요
당시 댄스 그룹 ‘소방차’가 한창 인기를 끌었어요. 소방차가 입었던 승마바지가 학생들 사이에도 많이 유행해 멋을 좀 안다는 아이들은 승마바지를 많이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나요. 친구 하나는 소방차의 김태형을 좋아한다며 이야기를 참 많이 했던 기억도 납니다. 또 당시에는 여성들 사이에 앞머리를 동그랗게 말아올려 스프레이로 고정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저희들도 앞머리를 최대한 동그랗게 말아 멋을 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동네 곳곳에 독서실들이 많았는데 독서실 총무 오빠를 좋아해 독서실에 총무 오빠 보러 다녔던 친구도 생각나네요.
주엽동 이혜진 씨


“연애편지 주고받던 풋풋했던 첫 사랑이 생각나요”
1998년이라... 풋풋했던 첫 사랑이 생각나네요. 경상도 시골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여고 앞에 남고가 있었어요. 그 때는 얼굴도 하얗고 해서 나름 인기가 많았는데요. 하루는 친구들이 남고에 아주 멋진 ‘퀸카’가 있다면서 둘이 너무 잘 어울릴 거 같다고 바람을 넣었어요. 그 날 이후 남고 앞을 지날 때면 이유 없이 가슴이 콩닥거리더라고요.
그렇게 한 달인가 지나서 연애편지를 받았어요. 그 퀸카한테 서요. 편지를 받고 어찌나 좋았던지, 호랑이 같이 무서운 언니가 아끼는 치마를 몰래 입고서 그 친구를 만나러 갔어요. 같이 떡볶이도 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꿈같은 데이트를 했죠. 결국 언니에게 들통이 나서 오래 만나지는 못했지만, 요즘 문득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네요.
일산동 김지선씨

리포터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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