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①

노예적 삶에서 자주적 노동자로 서다

2017-08-01 12:02:23 게재

고 권용목·이성도·장진수·유상덕·손길수 … '노동자가 잘사는 세상' 꿈은 아직 미완

30년 전인 1987년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 준 해였다.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국민과 노동자들이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6월항쟁에서 촉발된 노동자대투쟁은 울산 현대그룹 노조결성을 시작으로 마산·창원을 거쳐 수도권 등 전국으로, 생산직에서 사무금융 병원 언론 나아가 교사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또한 노동자대투쟁은 개별 노동자들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 12.5%, 1988년 11.9%의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한 결과였다.

노동자들은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가던 노예적 삶에서 자주적 인간으로 우뚝 일어섰다.

7·8월 노동자대투쟁에는 수년 전부터 노조를 준비하고 함께 싸운 주역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 우선 '노동자가 잘사는 세상' 꿈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다. 고 권용목·이성도·장진수·유상덕·손길수가 그들이다.

울산 현대계열 7개 계열사의 무기한 휴업조치에 항의, 현대중공업 운동장에서 8월 17일부터 이틀째 농성을 벌여온 노동자와 가족들은 18일 덤프트럭과 지게차 등을 앞세우고 16km 거리시위를 벌인 뒤 울산공설운동장으로 옮겨 농성을 벌였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의 '백미'였던 이틀간의 집회는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주도로 이뤄진 사실살 '울산지역 현대그룹 노동자총회'였다. 사진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제공

현대그룹 생산직 첫 노조결성

울산현대그룹 노동자 대투쟁은 1년 전부터 현대엔진과 현대자동차 등에서는 현장에 기반을 둔 작은 모임들이 있었다. 권용목(현대엔진), 이상범(현대자동차) 등은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노사협의회 위원 활동 등을 통해 현장 기반을 넓혔다. 소모임과 일상활동이 6.29 선언이라는 외적 상황과 결합해 노조결성으로 이어졌다.

일요일인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101명의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위원장에 권용목이 선출됐다.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이렇게 시작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한 현장보고대회에서 권 위원장은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현대엔진노조 결성에 자극받아 현대미포조선소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잇달아 노조가 결성됐다.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 11개 계열사 노조가 모여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를 결성했다. 권 위원장이 의장으로 선출됐다.

8월 18일 울산공설운동장에 현대그룹 11개 계열사 노조의 6만여 노동자와 3000여 가족이 모였다. 급기야 노동부 차관까지 울산으로 내려와 합의서를 발표하고 서울로 올라간 현대중공업노조 집행부도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노조 인정'을 받아냈다. 이 흐름은 1988년 10월 말 울산지역 15개 노조, 경인지역 6개 노조 등 21개 노조로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을 이어졌다.

권용목은 1988년 제1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민주노총 건설에 뛰어들어 1995~1996년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방위산업체에서도 노조쟁의

울산 현대그룹 내의 노조결성의 열기는 경남, 부산지역으로 옮겨졌다. 8월 13일 M16 소총을 만드는 국가 '가'급 방위산업체인 대우정밀 경남 양산시(군) 군수공장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성도 위원장이 앞장섰다. 그는 2대 위원장을 연임하면서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우정밀노조는 '단결은 생명이고 분열은 죽음이다' '우리 일은 우리 힘으로' '무지는 의존을 낳는다'라는 3대 원칙을 갖고 노조운동을 해 나갔다.

대우정밀 1600명 조합원 가운데 480여명은 동료들과 가족들의 지지 속에 1988년 4월 12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직접 담판을 벌이기 위해 상경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강제 연행된다. 연행되지 않은 180여명은 명동성당에서 10일간 농성을 벌인 끝에 4월 22일 사측으로부터 '고소취하, 즉각 교섭' 등을 받아냈다.

이 위원장은 새로 생긴 60개 노조를 중심으로 1989년 부산·양산·김해노조협의회를 결성해 초대 의장에 뽑혔다. 이러한 새로운 노조운동이 밑으로부터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한국노총과 다른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분임토의에 기초한 총회투쟁

경인지역 부천 경원세기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은 당시 모범이었다. 그 중심에 장진수가 있었다. 8월 11일 경원세기 노동자들은 가족과 함께 그리고 사무직도 노동자라는 입장에서 단결의 폭을 넓혔다. 이들은 9월 7일까지 28일간의 조합원 총회를 통해 어용노조를 바꾸고 장진수를 유일한 교섭대표로 하는 민주적인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학생출신'인 장민석 교육선전부장 등 해고자 복직도 쟁취했다.

장 위원장은 자주를 기반으로 민주를 중심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원칙을 몸소 실천했다. 경원세기 노조에서 사실상 처음 시작된 '분임토의에 기초한 총회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대명사가 됐다.

1993년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의장에 당선된 장진수는 전국 최초 '의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폭넓은 연대활동도 전개했다. 그는 2013년 6월 한국노총 제1회 김태환 노동상을 받았다.

교육민주화와 참교육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교사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1987년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이 출범했다. 유상덕이 중심에 있었다. 1980년 서울 신일고 전임강사로 처음 교단에 선 그는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파면되는 등 교사운동에 앞장섰다.

교직원 노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은 1960년부터 시작됐다. 4·19혁명 뒤 7월 서울에서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전국교조)가 결성됐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부 탄압으로 무너졌다.

1980년대 교사운동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사들의 고뇌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 1986년 YMCA 교사모임 중심의 '5·10 교육민주화 선언'을 계기로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는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전교협으로 발전했다. 전교협은 1989년 5월 28일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을 내세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 이어졌다.

전교조는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9년 7월 1일 합법화됐다. 하지만 2013년 10월 박근혜정부는 해고자의 조합원 유지를 이유로 들어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했다. 2015년 5월 헌법재판소는 전교조가 낸 위헌법률심판제청에서 합헌으로 결정했다.

유상덕은 1989년 전교조 출범 때 대외협력국장을 맡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동안 수배생활하다 구속되는 등 교사운동에 헌신했다.

차이를 극복하고 큰 단결로

경기 성남에서는 1987년 8월부터 시작된 동양정밀(OPC) 노조민주화 투쟁으로 12월 손길수 위원장으로 바뀌었다. 7·8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동양기계(OMC), 오텔코 노조가 결성돼 1988년 초부터 동양정밀 노조와 함께 그룹 3사 공동 임금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작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 단결해 절대로 노·노 싸움을 하지 않는다' '단위사업장 및 그룹 전체 노동자의 단결 그리고 가족까지의 단결을 강화한다'는 2가지 원칙을 세우고 함께 싸웠다.

손 위원장은 한국노총 성남지역지구협의회 의장이 되면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기치 아래 한국노총에 반대하던 노조들 모임인 성남노조협의회(성노협)와 통합을 추진했다. 세계노동절 100주년인 1989년 5월 1일 전국 최초로 성남지역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계열 등 노조 70여개가 하나가 된 성남노동조합연합(성남노련)이 탄생했다.

[기사 전문]
30년 전인 1987년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 준 해였다.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국민과 노동자들이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6월항쟁에서 촉발된 노동자대투쟁은 울산 현대그룹 노조결성을 시작으로 마산·창원을 거쳐 수도권 등 전국으로, 생산직에서 사무금융 병원 언론 나아가 교사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1987년 말 노동조합수 4103개(1986년 2675개), 조합원수 126만7457명(전년 103만5890명)으로 늘었다. 같은 해 발생한 노동쟁의 3749건 중 7~9월에만 3341건이 발생했다.

또한 노동자대투쟁은 개별 노동자들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7년 12.5%, 1988년 11.9%의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은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한 결과였다.

노동자들은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가던 노예적 삶에서 자주적 인간으로 우뚝 일어섰다.

7·8월 노동자대투쟁에는 수년 전부터 노조를 준비하고 함께 싸운 주역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 우선 ‘노동자가 잘사는 세상’ 꿈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있다. 고 권용목·이성도·장진수·유상덕·손길수가 그들이다.

현대그룹 생산직 첫 노조결성

울산현대그룹 노동자 대투쟁은 1년 전부터 현대엔진과 현대자동차 등에서는 현장에 기반을 둔 작은 모임들이 있었다. 권용목(현대엔진), 이상범(현대자동차) 등은 노동법을 공부하면서 노사협의회 위원 활동 등을 통해 현장 기반을 넓혔다. 소모임과 일상활동이 6.29 선언이라는 외적 상황과 결합해 노조결성으로 이어졌다.

권용목은 1957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1976년 천안공고를 졸업한 뒤 1978년 울산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부푼 희망을 품고 굴지의 재벌회사에 입사했던 그는 10년간 누구보다도 성실한 모범 기능공이었고 1984년부터는 반장직을 맡았다. 권용목은 “시간이 갈수록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현대의 노동현실에 분노를 느껴 가까운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요일인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 옥교동에 있는 한 디스코홀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101명이 모이자 홀 중앙에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글이 붙었다. 권용목을 위원장에 선출됐다. 당시 그는 만 29세 청년이었다.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이렇게 시작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한 현장보고대회에서 권 위원장은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자부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현대엔진노조 결성에 자극받아 현대미포조선소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잇달아 노조가 결성됐다.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 11개 계열사 노조가 모여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를 결성했다. 권 위원장이 의장으로 선출됐다.

권 의장은 “현노협의 탄생은 모든 것이 그룹회장 한사람에 의해 결정되고 각사의 경영실적 등에 관계없이 그룹차원에서 임금인상이 시행되며 모든 제도가 종합기획실에 의해 일괄 통제되는 현대그룹의 중앙집권식 가부장적 지배질서가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말했다.

8월 18일에는 울산공설운동장에 현대그룹 11개 계열사 노조의 6만여 노동자와 3000여 가족이 모였다. 이들은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등의 노래를 부르며 16km 행군 끝에 운동장에 도착했다. 대열 길이가 4km나 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 전날 전경과의 마찰로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트럭 지게차 등을 수도 없이 끌고 나왔다.

이날 집회는 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급기야 노동부 차관까지 울산으로 내려와 합의서를 발표했고 서울로 올라간 현대중공업노조 집행부도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노조 인정’을 받아냈다.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백미’였다.

권용목은 이날 집회를 “허름한 신을 신고 장장 16km라는 강행군을 감행한 가족들의 모습, 손에 손에 신발을 들고 하늘을 향해 팔을 힘차게 내젓던 모습은 노동자들의 소망이 무엇인가 보여준 위대한 행진이었다”며 “전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한 맺힌 어제를 딛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그 출발점이었으며, 사람다운 삶이 보장되는 내일을 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흐름은 1988년 10월 말 울산지역 15개 노조, 경인지역 6개 노조 등 21개 노조로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을 이어졌다.

권용목은 1988년 시작된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을 함께 하던 중 1989년 1월 8일 현총련 사무실에서 구사대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노동법 독소조항인 ‘제3자 개입금지’ 등으로 4번 구속됐다. 그는 1988년 제1회 전태일 노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민주노총 건설에 뛰어들어 1995~1996년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노동자 곁을 떠났다.

그 이후 권용목은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이인재 캠프의 ‘새시대개혁연대’ 대표, 정몽준의 국민통합21 노동특위 정책위원을 거쳐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를 끝으로 2009년 2월 13일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방위산업체에서도 노조쟁의

울산 현대그룹 내의 노조결성의 열기는 경남, 부산지역으로 옮겨졌다. 8월 13일 M16 소총을 만드는 국가 ‘가’급 방위산업체인 대우정밀 경남 양산시(군) 군수공장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성도 위원장이 앞장섰다. 이 위원장은 1957년 경남 양산시에서 태어나 1986년 7월 대우정밀에 입사했다. 그는 2대 위원장을 연임하면서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우정밀노조는 ‘단결은 생명이고 분열은 죽음이다’ ‘우리 일은 우리 힘으로’ ‘무지는 의존을 낳는다’라는 3대 원칙을 갖고 노조운동을 해 나갔다.

대우정밀 1600명 조합원 가운데 480여명은 동료들과 가족들의 지지 속에 1988년 4월 12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직접 담판을 벌이기 위해 상경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강제 연행된다. 연행되지 않은 180여명은 명동성당에서 10일간 농성을 벌인 끝에 4월 22일 사측으로부터 ‘고소취하, 즉각 교섭’ 등을 받아냈다. 당시 이 위원장은 “자본가들이 경총, 전경련 등으로 뭉쳐서 노동력 착취에 혈안이 돼 있는 만큼 우리 노동자도 기업별 한계를 벗어나 지역별, 그룹별, 산업별로 연대해 통일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새로 생긴 60개 노조를 중심으로 1989년 부산·양산·김해노조협의회를 결성해 초대 의장에 뽑혔다. 이러한 새로운 노조운동이 밑으로부터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한국노총과 다른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1995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1998년 민주노총 조직강화특별위원장, 2000년 민주노동당 박순보 부산연제구 국회의원 후보 선대본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3년 4월 19일 불의의 사고로 운명했다.

분임토의에 기초한 총회투쟁

경인지역 부천 경원세기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은 당시 모범이었다. 그 중심에 장진수가 있었다. 그는 1959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1983년 경원세기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그는 당시 회사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분노했다. 노동자들은 회사 관리자로부터 ‘껌을 씹는다’는 이유로 주먹질을 당하고, 긴 머리는 가위에 잘렸다. 초과노동은 한 달 130시간을 넘는 게 예사였다. 노조는 있었지만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했다.

8월 11일 경원세기 노동자들은 “어용노동조합을 민주적인 노조로 바꾸는 것은 오직 전체 조합원의 힘이 모이는 조합원 총회를 통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 그리고 사무직도 노동자라는 입장에서 단결의 폭을 넓혔다. 이들은 9월 7일까지 28일간의 조합원 총회를 통해 어용노조를 바꾸고 장진수를 유일한 교섭대표로 하는 민주적인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학생출신’인 장민석 교육선전부장 등 해고자 복직도 쟁취했다.

장 위원장은 자주를 기반으로 민주를 중심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원칙을 몸소 실천했다. 경원세기 노조에서 사실상 처음 시작된 ‘분임토의에 기초한 총회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대명사가 됐다.

1993년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의장에 당선된 장진수는 전국 최초 ‘의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폭넓은 연대활동도 전개했다. 그는 민주노총 사업장들과도 공대위를 중심으로 연대하면서 노동자 단결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현재에도 지역 현안에 있어서 폭넓게 연대하는 부천지역지부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진수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직전에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문서를 들고 사장을 찾아가 “개인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회사를 살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IMF 이후 회사에서 해고된 뒤 한국노총 조직국장으로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담당했다. 2005년 충주지역 레미콘노조의 파업을 지원하다 대체 투입된 레미콘 차량에 깔려 김태환 한국노총 충주지역지부 의장이 숨지자 그는 특수고용노동자의 권익신장을 위해 한 달여에 걸쳐 현장투쟁을 전개했다.

장진수는 2013년 6월 한국노총 제1회 김태환 노동상을 받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노총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정책연대’를 통한 지지에 나서자 몹시 괴로워하던 장진수는 그해 12월 4일 심장마비로 4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교육민주화와 참교육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교사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1987년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이 출범했다. 그 중심에 유상덕이 있었다. 유상덕은 1949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1975년 김상진 열사 추모제 사건을 주도했다가 실형을 산 뒤 야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1980년 서울 신일고 전임강사로 처음 교단에 선 그는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파면되는 등 교사운동에 앞장섰다.

교직원 노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은 1960년부터 시작됐다. 이승만정부 시절 3·15 부정선거에 대항하면서 교원노조의 필요성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4·19혁명 뒤 7월 서울에서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전국교조)가 결성됐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연행 1500여명, 실형선고 9명, 단식사망 5명 등 군사정부 탄압으로 무너졌다.

1980년대 교사운동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사들의 고뇌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 1986년 YMCA 교사모임 중심의 ‘5·10 교육민주화 선언’을 계기로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는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전교협으로 발전했다. 전교협은 사학비리 척결운동, 촌지 없애기 운동 등을 전개하며 세워진 지 1년 만에 전국 평교사의 10%에 이르는 3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전교협은 1989년 5월 28일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을 내세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 이어졌다. 노태우정부는 구속 107명, 강제해직 1500여명을 시키며 탄압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전교조는 교육 대개혁투쟁과 해직교사 원상복직 투쟁을 전개해 김영삼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1994년 3월 대부분의 해직교사가 복직했다.

전교조는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9년 7월 1일 합법화됐다. 하지만 2013년 10월 박근혜정부는 해고자의 조합원 유지를 이유로 들어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했다. 2015년 5월 헌법재판소는 전교조가 낸 위헌법률심판제청에서 합헌으로 결정했다.

유상덕은 1989년 전교조 출범 때 대외협력국장을 맡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동안 수배생활하다 구속되는 등 교사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당시 한 좌담회에서 “교육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렸고 노동생활의 미래가 걸려 있는 만큼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합심해 참교육을 이뤄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교조가 굳건히 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상덕은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지냈고 한국교육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2011년 7월 12일 암으로 숨졌다.

차이를 극복하고 큰 단결로

경기 성남에서는 1987년 8월부터 시작된 동양정밀(OPC) 노조민주화 투쟁으로 12월 손길수 위원장으로 바뀌었다. 7·8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동양기계(OMC), 오텔코 노조가 결성돼 1988년 초부터 동양정밀 노조와 함께 그룹 3사 공동 임금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작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 단결해 절대로 노·노 싸움을 하지 않는다’ ‘단위사업장 및 그룹 전체 노동자의 단결 그리고 가족까지의 단결을 강화한다’는 2가지 원칙을 세우고 함께 싸웠다.

손길수는 한국노총 성남지역지구협의회 의장에 뽑히면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기치 아래 한국노총에 반대하던 노조들 모임인 성남노조협의회(성노협)와 통합을 추진했다. 세계노동절 100주년인 1989년 5월 1일 전국 최초로 성남지역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계열 등 노조 70여개가 하나가 된 성남노동조합연합(성남노련)이 탄생했다.

기존의 새로 만들어진 노조가 한국노총의 바깥에서 새로운 구심을 형성하려고 한 데 비해 성남노련은 노동자 조직의 분열을 거부하고 새로운 통일을 이뤘다. 손 의장은 “노동운동을 대표자가 아닌 노동자 대중 중심으로 성숙하고 질서 있게 해나가자는 목적에서 결성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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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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