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정치 | 웅크린 말들

2017년판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소외계층 현장 보고서

2017-11-24 10:50:55 게재
이문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만원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듯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투명해졌지만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보이는 혹은 은폐된 고통의 목소리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일상적 빈곤'으로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대다수가 어려워하던 시절, 고통은 상수였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기본적인 생계에 묶인 삶의 무게는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신간 '웅크린 말들'을 보고 1978년 박정희 시대의 고달픈 민생을 다룬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의 저자 조세희 씨는 "난쏘공의 난장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고 했다. 40년전의 난장이들이 현재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웅크린 말들'은 자기 얘기를 꺼내 놓을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 이문영 한겨레 기자는 세상으로부터의 관심마저 낯선 사람들의 삶을 찾아 나섰다. 폐광 광부에서 시작해 구로공단 노동자, 에어컨 수리기사,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 구룡마을 사람들, 아르바이트생, 성소수자, 세월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나선 이 기자는 스스로 그들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의 말처럼 "시대문학과 예술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 가장 낮은 곳의 실존, 가장 짙은 그늘의 단아한 문장으로 담담하게 응시"하기 위한 것이리라.

이 기자의 첫발은 강원도 사북 폐광지역의 동원아파트에서 시작한다. 동원아파트는 과거 동원탄광 광부와 직원, 가족들의 안식처였지만 이젠 알코올중독자로 변한 전직 광부의 "최후의 품"이 돼 버렸다. 저자는 그를 중학교 3학년 딸과 함께 '구멍'까지 폐허 속에 깃든 생명으로 봤다.

버스 안내양, 식당 아줌마, 공장 아줌마, 청소 할머니로 불렸던 구로공단 여공 김필순의 지난했던 길은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 최이경씨로 옮겨간다. 가리봉동을 라스베가스로 생각하며 '가리베가스'를 오가는 조선족은 가리봉동을 떠난 여공의 자리를 메웠다. 김필순과 최이경의 시간 간격은 40년이지만 현실은 멈춰있다. 책 속의 사진을 도맡아 찍은 사진작가 김흥구씨는 "2017년 6월 서울 구로공단과 가리봉동, 고층의 빌딩이 첨단으로 깎아 지르는 동안 가난한 삶도 수직적으로 가팔라졌다"며 "거칠한 공단이 매끈한 얼굴로 바뀌어도 메마른 노동은 디지털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이 책의 또다른 재미는 글들이 시작되기에 앞서 내놓은 몇 개의 단어와 풀이다. 익숙한 단어지만 영 딴판으로 풀어놨다. 웅크린 말에 표정을 입힌 듯한 해석들은 현실을 파고들어 제 맘껏 실체를 드러내버린다.

마침내 저자는 "말해질 필요를 판단하는 것이 권력이고 말해질 기회를 차지하는 것이 권력"이라며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권력과 거리가 먼 존재일수록 말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말해지도록 길을 내는 언어가 절박하다"고도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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