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기 불시착, 알고보니 '짝퉁' 윤활유 탓

2018-02-19 10:36:33 게재

공군 예비역 출신 군납비리 적발

항공계 "전우를 사지로 내몬 꼴"

법원, 군납업자에 징역 6년 선고

2016년 2월 공군 훈련기 T-11이 경북 안동시 반변천에 엔진 이상으로 불시착했다.

당시 정비 불량으로만 알려졌지만 사고 배후엔 공군 간부 예비역 출신의 군납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법원은 군에 저질윤활유를 팔아 공급한 군납업자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실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가방위에 공백이 생겼다는 점을 무겁게 본 것이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2부(성창호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군납업자 이 모씨에 대해 징역 6년을, 이씨의 회사인 K화학에 대해서는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납품한 제품을 사용한 항공기가 엔진이상으로 불시착한 적도 있다"며 "기준 미달인 제품을 제조·납품함으로써 국가방위 핵심을 이루는 항공기, 함정, 발전기 엔진 이상으로 국가 방위에 중대한 공백이 생기기도 했다"고 질타했다.

원료·용기 모두 짝퉁 = 군용기나 군함에 쓰이는 엔진오일은 극한의 고온이나 혹한, 압력에도 쓸 수 있어야 한다.

방산업계에서는 이를 '밀리터리 스펙'(군사용 기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공군 예비역 간부 출신인 이씨는 오토바이나 트랙터에 쓰이는 엔진오일을 직접 만들어 군사용이라고 납품했다.

공군에서 군수분야 업무를 하다 퇴직한 이씨는 2008년 K화학을 설립해 항공기용 소모품이나 산업용 윤활유 등을 제조·유통해왔다.

이씨와 K화학은 방위사업청을 통해 군수사령부 등에 쓰이는 특수윤활유를 공급하기로 했다. 특수윤활유는 항공기나 함정이 정상적이고 정밀한 작동이 가능하도록 제작된다. 아직까지 국내 화학업계가 생산한 특수윤활유 중 군납 기준을 획득한 제품은 없다. 이 때문에 방사청의 기준을 통과하는 특수윤활유는 모두 외산이다.

방사청은 고품질 윤활유를 수입해 납품할 것을 요구했고, 이씨는 미국법인을 통해 방사청이 원하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국외조달원'으로 등록했다.

2013년 방사청이 군용기 엔진 윤활유를 사들이는 입찰 공고를 냈고, 이씨는 수입 정품을 납품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정품을 수입해 공급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이씨가 직접 제작한 짝퉁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짝퉁용기 1만개에 짝퉁 윤활유를 만들어 방위사업청에 납품했다. 48톤이나 되는 원료를 사들였고, 짝퉁용기에는 유명 화학회사 로고가 붙어있었다.

짝퉁을 만든 이씨는 정식으로 수입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더 치밀하게 조작했다.

이씨는 짝퉁 윤활유를 자신 회사 미국법인으로 보냈고, 미국법인이 현지에서 물건을 사들여 방사청에 공급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방사청은 정상 제품이 납품된 것으로 알고 이씨에게 42차례에 걸쳐 16억원을 지급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시험성적서나 수입신고필증 등 관련서류도 위조했다.

항공업계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한 항공사의 항공정비사는 "저질 윤활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비행기를 추락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국가를 지키는 데 사용되는 군용기 엔진에 품질 이하 윤활유를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산업체 관계자는 "오토바이에나 쓰는 엔진오일을 군용기에 쓸 경우 엔진을 손상시키고 작동 불능으로까지 이어진다"며 "다행히 군에서 군용기를 수시로 정비하기 때문에 대형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엔진 손상, 전자기판 녹기도 = 감쪽같이 속은 군은 이 짝퉁윤활유를 실제 군용기와 군함에 사용했다.

일부 군용기 엔진에서는 이유 모를 연기가 났고, 엔진부품도 손상됐다. 알려진 불시착과 조기회항의 원인은 정비불량이 아닌 군납 시스템의 구멍 때문이었다. 이씨가 납품한 윤활유를 썼던 군용기 등은 한동안 하늘에 뜨지 못했다. 각종 정비와 사고 예방 조치가 이어졌다. 하지만 공군은 정비 불량이나 유류 보관 등의 문제로 추정했다.

해군의 전력용 헬기에도 사용돼 기체 이상이 발견됐고, 이 가짜윤활유가 군함에 쓰이면서 문제가 커졌다. 녹 등 군함 외관에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해군은 전투용 윤활유를 방청제로 사용한다. 가짜 윤활유는 함정에 장착된 각종 제어장치와 전자기판까지 녹여 버렸다.

이 사건은 군이나 수사기관이 자체 인지한 게 아니었다. 이씨의 범죄행각을 눈치챈 이가 수사기관에도 제보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공군과 해군군수사령부를 상대로 내사에 나섰다. 경찰도 방위사업청은 물론 관세청을 통해 이씨 범행을 역추적 했다.

수사과정에서 이씨는 자신이 공급한 제품은 실제로 미국에서 구입했다거나 해외업체로부터 인증받아 생산한 제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군과 해군은 자신들이 사들인 짝퉁제품의 정품제조사에게 직접 문의했다. 그 결과 이씨는 제대로 된 원료를 구매하거나 제품 판매를 허락받은 적도 없었다. 이후 방사청은 유류와 같은 제품 납품·검증 시스템을 강화했다. 각종 인증서로 납품을 허가했지만 각군이 운영하는 유류시험소에서 공급된 제품의 성분검사를 일일이 했고,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 나와야 납품 대금을 지급했다.

그런데도 이씨는 경찰 수사를 문제 삼았다. 이씨는 법정에서 "경찰 조사 당시 강압적 분위기에서 진술이 이뤄졌고, (경찰은) 진술거부권도 고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우에는 진술조서를 위법수집증거로 본다.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전체 수사진행과정과 피의자신문조서 기재 내용 등을 종합해 이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씨의 진술조서 중 '진술거부권을 고지 받았다'는 부분에 이씨가 날인한 것을 근거로 들기도 했다.

재판부는 "자칫하면 항공기 추락과 같은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면서 "피고인의 범행이 매우 중대한데도 수사과정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오승완 고병수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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