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 뒤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헤게모니 전쟁

2018-04-12 10:47:30 게재

전략경제학자 윌리엄 엥달

이달 초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에 따르면 미중 무역갈등과 관련, 미국은 2013년 세계은행과 중국이 공동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중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당시는 로버트 죌릭 전 미국 무역대표(USTR)가 세계은행을 이끌던 때다. 보고서 명칭은 '차이나 2030'(China 2030)이었다. 중국에 신속한 시장개혁 완수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보고서는 "중국은 시장 기반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며 "민간 부문이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재정부와 국무원이 공동성명한 이 보고서는 "중국의 세계 전략은 개방시장과 공정성, 호혜협력, 글로벌 포괄성, 지속가능한 개발 등 핵심 원칙에 의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권인수팀 고문을 지낸 허드슨연구소 중국센터소장 마이클 필스버리는 SCMP 인터뷰에서 '차이나 2030' 보고서를 언급하며 "결국 중국이 합동보고서에 기술된 바와 같이 심도 깊은 경제개혁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중국은 다른 보고서에 기반해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첫 해인 2013년 '일대일로' 계획을 공개했다. 고속철도와 항만 건설을 통해 러시아와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동부를 포함한 유라시아 지역에 수조달러 산업 인프라를 건설해 경제통합지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시 주석은 2년 뒤인 2015년 이같은 계획을 포함한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전략보고서를 발표했다. '차이나 2025 : 메이드 인 차이나'(China 2025 : Made in China) 보고서다.

차이나 2025 보고서는 중국이 애플이나 제너럴모터스(GM)의 제품을 조립하는 초기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기술로 자급자족하는 최고 단계에 올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스마트폰 제조사인 화웨이가 애플이나 삼성과 견줄 정도로 극적인 성공을 거둔 게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전략경제학자인 윌리엄 엥달은 11일 자신의 블로그에 "'차이나 2025'는 그같은 발전을 지원하는 전략으로, 독일이 1871년 수립한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전략과 유사하다"며 "독일 제조업은 전략 수립 이후 30년 동안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경지에 올라섰다"고 설명했다.

현재 대중 무역 제재조치를 주도하는 건 미국 통상대표부(USTR)다. USTR이 공개한 약 200쪽 분량의 보고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짚고 있다. 지적재산권을 무시하고 외국계 기업을 차별하며 자국 기업들을 부당하게 지원하기 위해 특혜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 USTR 보고서는 '차이나 2025' 보고서를 거론하며 "문제가 많은 전략"이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조치 등을 통해 바꾸려 하는 대상이라고 지칭했다.

'차이나 2025'는 중국이 세계적 수준의 하이테크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청사진을 담았다. 고속철 기술과 항공기, 전기차, 로봇, 인공지능(AI) 기술 등을 전 세계에 수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엥달은 "그같은 전략은 전후 한국이 채용한 모델이기도 하다"며 "한국은 국가주도 발전전략을 채택해 노동집약적 산업경제에서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경제로 발전했다"고 언급했다.

중국에선 이미 인구학적 불균형 상황이 시작됐다. 따라서 중국은 현재 새로운 산업기지로 발전하느냐, 아니면 경쟁력을 잃고 정체에 빠지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 외국 기술과 투자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핵심 부문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차이나 2025'의 상당 부분은 독일이 2010년부터 추진중인 '인더스트리 4.0' 계획과 닮았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이미 최고 수준인 제조업을 디지털시대에 접목시키려 하고 있다. '차이나 2025'도 신기술 대체를 서둘러 산업의 자급자족 시스템을 추구한다. 하이테크 산업 부문에서 '제조업 슈퍼파워'가 되겠다는 것이다.

엥달은 "중국과 미국의 대결에 따른 이해관계는 지대하다"며 "따라서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는 중국의 경제전략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의 체면도 심각하게 훼손시킨다. 최근 중국 공산당이 운영하는 언론의 기사제목을 보면 그같은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인민일보는 머릿기사에서 "담대한 용기를 갖고 과감히 칼을 빼들어 뱀의 심장을 찌르자"며 "중미 무역전쟁은 오히려 트럼프의 지지층인 저소득 소비자, 산업 노동자, 농부 등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엥달은 미국이 중국에 가하는 무역관련 압력이 중국에 '분수를 알라'고 통고하는 성격이 짙다고 인식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자유주의 질서를 따르라는 압력이라는 것. 하지만 그 질서 내에 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 못하게 돼 있다. 글로벌 자유주의 질서의 결정적 힘은 다국적 기업 엘리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진핑 주석은 사실상 임기 제한 없는 지위를 구축했다. 마오쩌둥 이래 가장 강력한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런 시 주석이 자국의 경제적 주권에 대해 외국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는 게 엥달의 분석이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당국자들과 개인적으로 수많은 토론을 벌였다"며 "토론 끝에 얻은 결론은 중국은 미국을 쇠락하는 패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미국은 과도한 부채를 짊어진 과거의 산업국가이자 실패한 자본주의 모델로 자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현격히 망치는 나라"라고 지적했다.

1873년 당시로선 후진국이라 여겨졌던 독일과 미국 등이 세계시장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대영제국에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벌어졌다. 대영제국 몰락의 서막이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미국에 대해 '다극화된 세계의 대안'이 되고자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엥달은 "중국이 러시아와 유대를 공고히 하면서 위안화의 힘을 키우고, 서구 중심의 금융체계인 스위프트(SWIFT)의 대안체제를 마련하며, 남중국해 등에서 미국이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데 대한 군사적 방어력을 향상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관점에서 그는 "중국의 신임 국방부장 웨이펑허의 첫 번째 해외 순방이 러시아 국방장관과의 만남이었고, 미국에 대항해 유라시아 2개 대국이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점을 안팎에 과시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3일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중국은 2013년 세계은행 보고서에 굴복하거나 복귀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시사했다. 이 매체는 "미국은 전 세계에 위력을 행사하길 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잘못된 도박이다. 미국의 집권층은 자신의 권력을 과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글로벌타임스는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과거의 헤게모니'를 재건할 방법이 없다. 글로벌화와 민주주의가 미국의 헤게모니 근간을 침식하고 있다. 미국은 힘과 의지, 내적 통합력이 부족하다. 사실 미국은 중국과 같은 대국은커녕 이란과 북한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미국은 더 이상 제국으로서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엥달은 "이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트럼프는 물론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며 "최근까지 상승일로에 있던, 거품이 팽배한 미국 증시는 미중 무역전쟁 가능성에 긴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판할 경우 역사상 최악의 투기거품이 일시에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현재 트럼프는 무역전쟁뿐 아니라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질서와 중국 주도의 국가주도 경제개발 모델을 대결시키고 있다. 엥달은 "중국과 러시아 이란뿐 아니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 일부 유럽국가들도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 어젠다가 자국의 미래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며 "미국 주도 질서에 대한 반감이 깊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매우 중대한 지정학적 지각변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전쟁을 계속 고조시킨다면, 중국은 단호히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라며 "비록 그 과정에서 중국 역시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는다 해도 '차이나 2025'에서 정의내린 중국식 경제모델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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