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의 금융교실

반갑지만 않은 '호모 헌드레드 시대'

2018-08-02 11:33:15 게재
박철 KB국민은행 인재개발부 팀장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통계로 본 광복 70년 한국사회의 변화> 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광복 이후 43년간 20세가량 증가했다. 평균 수명이 매년 0.5세의 속도로 가파르게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한 해에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이 85세를 넘어 90세를 향하고 있다. 100세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전문가들은 현재 30대의 절반 가까이는 100세 생일상을 받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는 누구나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100세 시대 대응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만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심지어 우리나라 국민 중 10명 중 4명은 100세까지 장수를 '축복'이기보다는 '재앙'으로 인식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우리사회가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 시대'를 마냥 반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 그럴까. '잿빛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은퇴연령은 52.6세다. 100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평균 은퇴연령에 퇴직하면 은퇴기간이 무려 50년이나 된다. 만약 그토록 오랜 기간을 '돈 걱정'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지 모른다.

실제 우리나라는 노인빈곤율 1위, 노인자살률 1위 등 유독 노인과 관련한 '불편한 세계 1위'가 많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7.7%(2016년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노숙하는 노인, 폐지·고철·공병수집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 등 사회곳곳에서 가난한 노인들의 절망스런 풍경이 일상처럼 펼쳐지고 있다.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빈곤노인 숫자가 175만명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있을 정도다.

잿빛 노후에 대한 두려움 커져

일전에 <무더위보다 무서운 생활고> 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기초연금 20만원으로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가던 70대 할머니가 폭염 속에서 폐지를 줍다가 쓰러져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나마 몸이라도 성해 폐지라도 주울 수 있다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늙고 병들었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빈곤 노인들이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장수가 악몽이 되는 시대가 이미 대한민국을 덮치고 있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가 반갑지만 않은 이유다. 100세 시대는 늘어난 수명만큼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자녀들 뒷바라지에 노후준비까지 '걱정거리'도 '걱정하는 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죽하면 요즘은 "정말 100살까지 살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까지 광고에 등장했다. 물론 은퇴 후에도 재취업이나 창업을 통해 고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다.

하지만 은퇴 후 재취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청년실업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퇴직자들의 재취업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다. '창업'은 더더욱 녹록하지 않다. 한창 젊었을 때도 못했던 사업을 판단력도 떨어지고 기력도 쇠약해진 은퇴 후에 시작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만두면 치킨가게나 차리지"술자리에서 노후준비가 화제로 오를 때면 직장인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하는 말이다. 퇴직 후 가장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치킨가게 사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창업 후 3년을 못 버티는 치킨 집이 절반이나 됐다. 평균 생존기간이 겨우 2.7년에 불과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치킨 집 버블'탓에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자칫 특별한 대책 없이 호구지책으로 창업의 길에 나섰다가는 피 같은 퇴직금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 앉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청년실업 못지 않게 심각한 퇴직자들의 재취업과 창업대란이다. 인생은 길고 은퇴 후 인생은 더 길어졌다. 그래서 은퇴 전에 아직 젊고 경제력이 있을 때 하루라도 빨리 노후준비에 나서는 게 현명하다.

너무 늦게 시작하는 노후준비

하지만 보통 40대 후반이나 되어서야 노후나 은퇴라는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노후준비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준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후준비 얘기를 들으면 20~30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일쑤다.

필자도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50대에 들어서고 보니 노후가 곧 닥칠 현실임을 수시로 실감하고 있다. 생활비·교육비 등으로 젊은 시절에는 노후준비를 할 여유가 없다고 푸념하지만 나이 들어서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면 모아 놓은 돈도 없이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 찾아온다.

100세 시대가 축복인가 위험인가는 결국 충실한 노후준비에 달려있다. 장수를 축복으로 연결시키자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이미'라는 시간과 '아직'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선택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박철 KB국민은행 인재개발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