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활에 기대다

정우영 시인이 제안하는 '삶의 방향'은

2018-09-07 11:07:43 게재
정우영 지음 / 반걸음 / 9000원

"발자국은 나를 떠나/ 저 너머로 뒷걸음질쳐 갔으나,/ 차마 이별을 고하진 못하고 되돌아와/ 다시 내 발밑을 받친다./ 발자국이 없으면 어쩔 뻔했나./ 내 삶을 부양한 것은 저 수많은 발자국들."('눈길-설날 아침' 부분)

정우영 시인이 8년여 만에 4번째 시집을 냈다. 30년 동안 4권의 시집은 과작에 속한다. 그 사이에 2권의 시평집이 있지만 정 시인의 걸음걸이는 달팽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의 시 '눈길-설날 아침'을 읽으면 그가 천천히 시집을 펴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눈길-설날 아침'은 문명의 속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 여기저기 거니는 시인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시에는 정신을 현란하게 하는 속도가 없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사실 속도와 속도로 짜여 있다. 그래서 그 안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현대인들은 속도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 시인의 시는 속도가 없이 편안하다. 대신 삶에 대한 어떤 방향성이 존재한다. '눈길-설날 아침'에서 "발자국"은 "저 너머로 뒷걸음질쳐 갔으나" 다시 돌아와 "내 삶을 부양"한다. 먼 데 있지 않은, 가까운 것들과의 교감은 그의 시에 인위적 속도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의 방향성은 목숨들을 부르는 데 이른다. 정 시인은 몸에서 가까운 사물에도 목숨을 불어넣는다. "안경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다른 때 같으면 먼저 여분 안경 찾았을 것이나/ 어쩐지 그런 생각은 안 들고/ 다리 부러진 안경이 짠해지는 것이다./ 부러진 다리와 다리 잃은 몸통/ 받쳐 들고 사뭇 경건해진다."('달리는 무어라 부를까' 부분) 나아가 사회적 죽음을 당한 존재들에게도 그는 주목한다. 세월호와 함께 버려진 목숨들, 야만스러운 정권이 죽인 강 등에 대한 주목이 그것이다.

정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서 헤맨 시간이 길었다./ 내게 와 얹혀 떠도는 입김 같은 것들을 불러 모았다./ 아련하게나마 형태가 어른거려 내려놓는다.// 이곳이 나다./ 활(活)의 숲이 싱그럽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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