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렇게 들어만 줘도 마음이 풀립니다”

2019-02-18 08:58:21 게재
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

사람 얼굴에 눈이 두 개인 것은 좌우를 두루 살펴보면서 균형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귀가 두 개인 것은 상충하는 양쪽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인 것은 자신의 말은 가급적 삼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능한 심리상담가가 되려면 슬픈 사연에는 상대방보다 더 슬퍼하고 화가 나는 일에는 상대방보다 더 분노하는 충분한 감정이입과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민선 7기 서울 관악구청장이 되어 지방행정가로서 민생현장에서 발로 뛰며 이런 말들을 깊이 실감하고 있다.

경청하면 사람의 마음 얻을 수 있다

이청득심(以聽得心).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지난 지방선거 때 당선이 되면 5층에 있는 구청장 집무실을 1층으로 내려 주민소통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청장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며 구청장이 되면 만나줄 것이냐고 묻는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청 1층에는 주민들이 빈번히 찾는 민원실이 있어 공간 확보가 어려웠고 그 밖에 현실적인 이유로 약속을 바로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찾은 대안은 구청 1층에 있던 민원상담실을 카페형 공간인 ‘관악청(聽)’으로 대폭 확대하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이곳에서 구청장이 주민을 직접 만나는 ‘열린 구청장실’을 운영하기로 했다. 관악청(聽)은 서울시청의 시민청처럼 주민들이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대화도 나누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동시에 단체장 집무실을 같이 둔 것은 전국 최초의 새로운 시도였다.

지난해 11월 관악청(聽)이 문을 연 이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주민과의 대화시간을 빠짐없이 가져왔다. 하루에 보통 10여명씩 주민들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장기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민원이 대부분이었다. 기초자치단체장의 권한이나 재량을 벗어난 것이라 구청장으로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 어려움을 겪어 온 주민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듣다보면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관악청 민원은 주민의 재산권과 밀접한 분야가 특히 많다. 두 달간 접수된 106건의 민원 가운데 건축주택, 도시공원, 건설교통 분야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 신림동에 거주하는 김 모 어르신이 집 주변 토목 공사 때문에 지하실에 누수가 생겨 피해를 보고 있으니 구청에서 보상을 해 달라고 찾아 오셨다. 자신에게 억한 심정이 있는 공사 담당자가 의도적으로 누수를 일으켰다며 화가 많이 나 있으셨다. 하지만 같은 민원을 몇 일전 해당부서에 제기해 이미 담당 공무원이 조사를 마쳤고 주변 토목 공사와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경청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다른 주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르신의 말씀을 충분히 들어드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하셨을 때 위안과 함께 “해결책을 최대한 찾아보겠지만 구청장의 권한과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어르신의 낙담하신 표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아이고, 이렇게 구청장이 직접 들어만 줘도 마음이 한결 풀립니다”라는 어르신의 마지막 말 한 마디는 하루에 쌓인 피로를 모두 씻어줄 만큼 감사했다.

주민들의 사연을 듣고 사실관계를 차분하게 규명하고 주민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봤다. 의외로 어려웠던 민원이 바로 해결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법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민원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불가능하다고 딱 자르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답답함을 나누어 어려움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바라는 것이 관악청을 만들어 주민 목소리를 경청하는 이유다.

구청을 넘어 주민들 삶의 현장 속으로

이제 개나리꽃 피는 봄이 오면 관악청(聽)은 더 많은 주민들로 북적일 것이다. 봄에는 구청을 찾기 어려운 주민을 만나고 현장에서 처리해야하는 민원 해결을 위해 ‘찾아가는 열린 관악청(聽)’도 운영해보려 한다. 동시에 온라인상에서 토론과 제안, 주민투표까지도 할 수 있는 ‘온라인 관악청(聽)’도 만들 계획이다. 관악청(聽)이 구청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 생생한 삶의 현장 속으로 또 온라인까지 확대되어 모든 주민과 함께 소통하는 행정이 실현되길 바란다.

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