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5주년 특별기획 - 국책연구기관장에게 듣는다│조황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과학기술은 국가 생존문제, 지도자 인식 중요"

2019-04-08 11:02:23 게재

선진국됐지만 과학기술정책은 '캐치업' 단계 머물러

논문 200편 써도 해외 '톱' 연구자 논문 1편 못 이겨

'관리친화형 → 연구친화형' '관여형 → 자율형'으로

중국 과학기술인력 양적·질적 성장, 경쟁 버거워져

"과학기술은 산업이나 경제를 넘어 국가 생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사진 이의종

조황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은 내일신문과 인터뷰에서 "국가지도자가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이 과학기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지도자들이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얘기는 하지만 아직 예산이나 정책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과학기술 분야도 과거 '캐치업(선진국 따라잡기)' 단계의 양적 투입 전략에서 벗어나 질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과학기술 정책은 '관리친화형'에서 '연구친화형'으로, 연구개발(R&D)도 '정부관여형'에서 '자율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원장은 전남대 공업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산업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30년 가까이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재직하며 산업혁신연구부장, 혁신정책연구센터장, 기획조정실장, 부원장 등을 역임한 '정책통'이다. 국가과학기술장기계획 기획위원, 국가과학기술심의회 공공·우주전문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책입안에도 참여했다.

조 원장과 인터뷰는 4일 양재동 엘타워에서 진행됐다.

■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은 어떤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양적으로는 뒤지지 않지만 질적으로는 굉장히 미약하다. 그동안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지표를 양적으로 만들어 놓고 양적 성장에만 치중해온 탓이다. 선진국은 질적으로 평가한다. 미국의 유명한 교수들 중에는 평생 1~2편의 논문만 쓰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100편, 200편씩 써야 한다. 그런데 100~200편의 논문이 세계 '톱' 수준의 논문 1편을 못 이긴다.

지금까지는 선진국을 따라잡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양적인 투입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돼왔다. 많이 투입하면 빨리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따라갈 상대가 별로 없다. 비슷한 수준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는 개발도상국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본다. 과거에는 길이 보였기 때문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앞으로 쭉 나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길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 선진국이 됐지만 과학기술정책이나 연구개발(R&D) 관리제도는 여전히 '캐치업(선진국 따라잡기)' 단계에 매몰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한국을 이끌어가겠다는 리더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발전시키는 경험을 해봤다. 그게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 지도자들은 과학기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산업이나 경제발전 측면에서만 생각하지만 과학기술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 과학기술이 바로 국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독일이나 일본에선 과학기술이 국가 정책에 깊숙하게 연계돼 있다. 또 중국의 경우 새해가 되면 최고지도자가 제일 먼저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를 만난다. 그만큼 과학기술의 위상이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미국은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정부의 R&D 투자방향을 발표한다. 대통령이 발표하면 예산에 반영되고 모든 부처에서 정책에 녹여 실현한다.

우리나라는 총론적으로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만 얘기하지 예산이나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 문재인 대통령은 과학기술계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달라진 게 없나.

과학기술의 자율성 보장과 책임 강화는 과거부터 숱하게 나왔지만 제대로 풀지 못하는 난제다. 대통령의 문제라기보다는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시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제도나 규제 등 사회 전반의 문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 분야가 '관리친화적'에서 '연구친화적'으로, 또 성과창출이 잘 이뤄지도록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게 '국가연구개발 혁신을 위한 특별법'인데 아직 국회에서 통과가 안되고 있다. 특별법은 국가연구개발사업 추진에 관한 행정제도의 개선, 연구개발과제와 관련한 제도개선 방안을 담고 있다. 법이 통과되면 과학기술계의 자율성 보장과 책임 강화 측면에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

■ 과학기술 인력양성은 어떻게 되고 있나.

과학기술 인력양성 역시 그동안 사회 수요 관점이 아닌 공급자 중심의 양적인 측면에 맞춰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매년 배출되는 이공계 박사 중에 수천명이 제대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미국은 '오버닥터(박사학위를 받고도 취업을 못하는 고학력 인력)'문제가 없다.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R&D에 투자하는 민간펀드가 많다. 포드재단이나 빌 게이츠 재단 등 민간재단이 많은데 R&D에 투자를 많이 한다. 우리도 포스코 재단 등 민간재단이 많지만 R&D보다는 장학사업에 투자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R&D 투자는 정부가 독점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정부와 민간의 경쟁이 이뤄진다. 정부자금에 비해 민간펀드는 연구자에게 좀 더 자율성을 부여해줄 수 있다. 한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관여형 R&D'라면 미국은 '자율형 R&D'가 돼 있는 것이다. 미국은 R&D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만들고 그 속에서 인재가 길러지면 이들이 다시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우리는 R&D하고 학문이 연계가 안돼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삼성이나 LG 등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국내 대학보다 미국 대학에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세상을 바꿀 기술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 중국은 어떤가.

이미 중국하고 경쟁하기가 버거워졌다. 중국이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훌륭한 과학자가 많이 늘었다.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외국 유학생 중 중국 학생들이 가장 많다. 그 다음이 우리나라와 일본인데 일본은 계속 줄고 있고, 우리도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 4차 산업혁명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객관적인 기준이나 지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가지 측면을 같이 봐야 한다. 4차 산업혁명 관련 R&D와 기술개발, 비스니스 모델,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인 규제다. 3개가 잘 맞물려가야 성공할 수 있는데 미국이 그렇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회적 수용성 부분에서 굉장히 뒤쳐져 있다고 본다. 아무리 기술을 갖고 있어도 제도가 막고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 정부가 혁신성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연구원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산업과 기업의 혁신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전 산업의 디지털 수용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 기업의 기술 경쟁력과 미래 대응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 등을 고민하고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기술 규제를 어떻게 예견적으로 연구해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 또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창업을 쉽게 하도록 할 것인지 등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중소기업 관련 정부 R&D 지원자료와 기업 재무자료를 연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부의 중기 R&D를 효율화하는 정책설계를 제안하기도 했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올 하반기 '2040 과학기술혁신전략'을 발표할 예정인데 어떤 내용이 담기나.

선진국에 걸맞은 과학기술 일류강국이라는 방향성을 갖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를 위해 시스템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산업시스템, 국가기간시스템, 사회시스템, 혁신시스템 등 시스템 전환을 통해 도약하느냐 못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거버넌스와 인센티브 설계를 통해 시스템 전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 미래사회에 요구되는 법을 어떻게 운용할지도 중요하다. 신기술이 등장함에 따라 가령 AI 관련법, 로봇 관련법 등이 중요해지고 있다. 미래 기술과 관련에 어떤 법들이 요구되고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전략에 포함돼야 한다.

아울러 미래 기술의 '빛'과 함께 '그림자'도 고민해야 한다. 미래 기술이 우리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어두운 측면도 얘기해야 인문사회분야에서의 보완연구가 가능하다.

■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떤가.

핵 미사일 분야 뿐 아니라 IT분야, 특히 소프트웨어쪽은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은 다른 개도국과 달리 기초교육이 잘 돼 있는 나라다. 그래서 잘만 하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의 남북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어의 통일이다. 용어가 다르면 대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북한의 과학자나 기술자는 핵 미사일 등 특정분야에 몰려 있는데 이런 기술들을 경제와 산업으로 돌리기 위해선 정책전문가가 많이 필요하다.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북한의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를 트레이닝하는 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연구원이 중점을 두고 있는 연구과제는 무엇인가.

국가적 난제 해결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려 한다. 여기서 난제는 '왜 우리나라는 혁신이 잘 일어나지 않는가', '미래 에너지는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와 같은 경제·사회시스템의 전반적인 혁신과 전환의 전략이 필요한 문제들이다. 우선 난제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 난제 해결을 위한 시스템 전환의 방법론을 마련하고 또 관련 이해관계자·전문가 등과 공감대를 형성해 해결책을 모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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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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