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증시, 자사주매입 없으면 폭락?

2019-04-10 11:44:21 게재

골드만삭스, 정치권에 경고

'자사주매입이 금지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골드만삭스가 최근 민감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미 증시의 향방은 자사주매입이 좌우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면 증시가 폭락한다는 주장이다.

S&P다우존스인덱스가 지난달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4분기 미국 기업의 자사주매입은 전년 동기 대비 62.8% 오른 2230억달러였다. 사상 최고치였던 전분기 2040억달러를 흘쩍 넘었다. 이는 4분기 연속 최고가 경신 기록이다. 2018년 전체의 자사주매입 규모는 전년 대비 55% 상승한 8060억달러였다. 이전 최고치였던 2007년 5890억달러보다 37% 많았다.

자사주매입은 2015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인 5640억달러를 기록했다가 2016년과 2017년 다소 하락했다. 그러다 지난해 1월 1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안이 발효되자 큰 폭으로 치솟았다.


지난해 4분기 자사주매입 규모가 분기별 최고치를 찍었지만 같은 기간 S&P500지수는 오히려 5.3% 하락했다. 글로벌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진 때였다.

2018년 자사주매입 1위 기업은 애플로, 742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이어 오라클 293억달러, 웰스파고 210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 163억달러, 머크 91억달러 순이었다.

하지만 자사주매입 기업을 제외하면 누가 주식을 사고 팔았을까. 골드만삭스가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 자료를 참고해 2014~2018년 5년치의 '미국 주식 순매매 현황'을 분석한 결과 외국인 투자자들은 미국 기업 주식 2340억달러어치를 순매도했다. 연기금은 무려 9010억달러어치를 순매도했다. 뮤추얼펀드도 2170억달러어치를 떨어냈다. 반면 일반투자자와 보험사는 각각 2230억달러, 610억달러 순매수했다.

기업을 제외한 투자자를 모두 합하면 5년 동안 1조680억달러를 순매도했다. 하지만 기업의 주식순매입 규모(2조4520억달러)는 이를 2배 이상 압도했다. 여기엔 자사주와 다른 기업 주식이 섞여 있다. 자사주매입만 따로 추리면(상단 그래프) 기업들은 5년 동안 2조9540억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을 사들였다. 즉 투자자들은 팔고, 기업들은 자사주를 사들여 증시를 부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주매입이 금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블룸버그통신 최근 기사에 따르면 1982년까지 자사주매입은 '증시사기'로 간주돼 엄격 금지됐다. 하지만 이듬해 관련 규정이 느슨해지면서 합법화됐다. 하지만 현재 미 의회엔 공화 민주 초당파적으로 기업지배력의 남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자사주매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플로리다주 공화당 상원의원인 마르코 루비오와 버몬트주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다. 이에 대한 찬성 의견이 세를 더하고 있다. 법률 발의안이 준비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상황전개를 우려하며 '자사주매입 없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할지'에 대해 공개경고하고 나섰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증시가 하락하게 되면 그 어떤 정치인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자사주매입이 없는 세상은 입에 담기조차,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골드만삭스는 "미 증시를 떠받치는 최대 세력은 자사주를 매입하는 기업들이었다"며 "자사주매입을 금지한다면, 주가는 폭락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는 자사주매입 금지를 반대하기 위해 지난 25년 동안 임의적 자사주매입이 금지되는 분기별 '블랙아웃'(blackout) 기간을 살폈다. 미 증권거래법에 따르면 기업들은 분기실적 발표 5주 전부터 발표 이틀 뒤까지 실적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임의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하지만 블랙아웃 기간이라 해도 임의적이 아닌, 예정된 자사주매입은 가능하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분기별 블랙아웃 기간의 증시 변동성(volatility)은 16.4포인트, 그렇지 않은 기간은 15.8포인트였다. 주당순이익(EPS, 기업이 벌어들인 순이익을 그 기업이 발행한 총 주식수로 나눈 값)도 줄어들게 된다는 주장이다. 자사주매입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수가 줄어들면 당연히 주당순이익은 늘어난다. 반대로 자사주매입을 금지하면 EPS 성장률과 실제 이익성장률은 동일해진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자사주매입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수가 줄어든 덕분에 지난 15년 동안 S&P500 중위기업의 EPS 성장률은 실제 이익성장률보다 평균 2.6%p 높았다. 따라서 골드만삭스는 "자사주매입이 사라진다면 향후 EPS 성장률은 약 2.5%p 낮아질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EPS가 그만큼 하락할 때 주가수익비율(PER)은 1포인트 하락해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낮춘다"고 주장했다.

결국 골드만삭스 주장의 요지는 '기업의 실적을 제대로 반영하는 수치가 아니라 투자자의 주식 수요를 견인할 매력적인 수치가 중요하다'는 것. 주요 투자자들의 주식 보유비중이 이미 높은 상황에서 자사주매입을 통해 수요를 견인할 주체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일반 투자자와 뮤추얼펀드, 연기금, 외국인 투자자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44%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을 고려했을 때 86퍼센타일(percentile)에 해당하는 수치다. 즉 주식 비중이 44%보다 높았던 경우가 14%에 불과했다.

골드만삭스는 "다른 투자자들이 자사주매입 금지로 줄어들 수요를 대체하지 않는다면 증시를 떠받치던 대규모 수요의 원천이 사라지는 셈"이라며 "미 증시는 힘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온라인 금융전문 매체 '울프스트리트'는 이에 대해 "자사주매입은 낮은 가격에 질 좋은 자산을 확보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가격에라도 사들여 주가를 높이겠다는 것"이라며 "증시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사주매입 없이도 가격발견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두는 것은 골드만삭스와 같은 월가 금융기관에게는 재앙"이라고 꼬집었다. 이 매체는 "그 누구도 자사주매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며 "그런 세상은 월가 금융기관에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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