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의병장 강기동' 순국 108주기"

2019-04-16 11:47:12 게재

용산구 지역연고 독립운동가 소식지에 소개, 주민과 공유

"달포 전 서울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군법회의에 부쳐졌던 적괴(賊魁) 강기동 … 보병 65연대 병사 3명으로 하여금 포형(砲刑 총살형)을 거행케 하였는데 불과 한발에 왼쪽 이마를 관통하여 봄풀의 한점 이슬이 되었다더라…."

1911년 4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 '강기동의 포형'이 서울 용산구가 발행한 이달 소식지에 실려 눈길을 끈다.<사진> 용산구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역과 연고가 있는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기획을 준비했다고 16일 밝혔다.


의병장 강기동(1884-1911) 선생은 서울 중구 명동에서 태어나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능숙한 일본어 실력 때문에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돼 일본군과 인연을 맺는다.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를 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온 의병 2명을 탈주시키고 총과 탄환을 훔쳐 이은찬(1878-1909)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이후 경기도 포천과 양주 등지에서 활약을 했는데 당시 일본군은 강기동 선생에 현상금 500원을 내걸기도 했다.

선생은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남한대토벌' 작전을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본군에 체포, 서울에서 조사를 받고 용산 군사령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선생은 현재 용산 미군기지 내에 위치한 위수감옥에 수감됐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위수감옥은 당시 일본이 군법을 어긴 군인과 군속을 가두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선생은 28세에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용산구가 매달 6만4500부 가량 발행하는 소식지에 강기동 선생 이야기를 담은 건 지난 2017년부터 진행해온 '용산기지 역사문화유산 소개' 일환이기도 하다. 지난달까지 미군기지 내 문화유산과 자연물 18곳을 소개했다. 이달은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만큼 인물 이야기를 담았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강기동 선생 최후를 새롭게 그려봤다"며 "선생 외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위수감옥에 수감됐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강기동 선생은 후손도 남아있지 않지만 용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애국선열인 만큼 우리 주민들이라도 선생의 아들 딸이 되어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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