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⑨ 의정원, 공채 발행 의결

공채로 모은 자금, 윤봉길 의거·한국광복군 창설 밑거름 됐다

2019-04-25 13:49:34 게재

연 5% 원화·연 6% 달러 독립공채, 1919~1948년까지 29년간 발행해

독립후 5~30년 사이에 갚는 조건으로

1983년이후 57건, 3억4241만원 상환

국회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임시의정원 예산·결산 심의 내용을 보면 임시정부의 살림이 드러난다.

1930년 11월 18일, 김구 임시정부 재무장이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제출한 1927~1930년 결산안을 보면 수입항목에 만 20세 이상 국민에게 징수하는 인구세, 국민의 자발적인 애국금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1934년 10월 30일, 국무위원 연명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제출한 '1935년도 수입과 지출 예산내역'을 보면 중국정부로부터 받은 특종수입액과 특종사업비는 공개하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 의사는 행사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제치고 일제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처단했고 노무라,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 대해 당시 중국 정부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는 윤 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자료 국가보훈처


1934년 10월부터 1935년 8월까지의 결산보고는 수입항목이 충성금 애국금 인구세였다. 1940년 수입부는 애국금 혈성금 후원금 특종수입이 주를 이뤘다. 1941년에는 세입부에 독립금 과목이 증설됐다.

1942년 임시의정원 세입세출결산서는 세입 총액이 5만7886원이었으며 의회비 비서국비 등을 포함한 세출 총액은 5만7835원이었다. 1945년 예산안의 세출항목은 청사비 비품비 도서비 보조비 선전비 장교양성비 군대편성비 특무공작비 의정원비가 들어있었다.

◆빠듯한 살림살이 = 국가를 잃은 임시정부의 타향살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921년 7월 1일 대한민국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국무원 연설문에서는 재정상의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승만 당시 임시대통령은 "그들 각원 일동은 엄동에 도착함에 옷이 없고 식사함에 스스로 음식을 얻을 길이 없어 불 없는 실내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고로하면서도 그 진상을 국민에게 알리지 못한 것은 첫째 정부의 위신을 보전하기 위하여서이고 또 오인이 빈약한 것을 적에게 깨닫지 못하게 함이다"고 했다.

원화표시 독립공채

◆공채모집에 적극 나서 = 독립운동을 꾸려가기 위한 자금들은 주로 중국 정부와 함께 국내외 동포들의 은밀한 지원으로 채워졌다.

1919년 4월 25일에 만든 임시의정원법 제 6조 '의정원의 직권'에서는 공채 모집과 국고 부담에 대한 사항이 들어있다. 1919년9월11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에서는 제4장에 임시의정원을 배치하고 제21조 임시의정원의 직권에서 4절 공채모집과 국고부담에 관한 사항을 의결함이라고 했다.

국회도서관이 일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철'(모리아 문서)에서 발견한 재무부령 제 1호인 '공채모집위원에 관한 규정' 따르면 공채 모집규모(10조)와 관련 △1만엔 이상 재산소유자는 그 재산의 삼십분의 일 △오만엔 이상 재산소유자는 그 재산의 이십분의 일 △십만엔 이상 재산소유자는 그 재산의 십분의 일 △만엔 이하의 재산 소유자는 임의로 한다고 했다. 1920년3월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시정 방침 연설문을 보면 이 총리는 "이번 대거의 제반 경영은 금전이 마련된 후에 성공할 것이므로 상당한 금력을 준비하기 위해 그 방침으로서 인구세. 애국금, 공채 발매 등으로 국민동포에게 징수할 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달러표시 독립공채

◆공채악용도 적지 않아 = 그러나 허위공채를 발행하거나 공채를 사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1919년 7월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는 이승만이 줄곧 요구해 온 국채발행권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이승만은 7월 3일 임시정부에 전보를 보내 재무총장이나 국무총리 명의로 임시의정원이 자신에게 대통령으로 국채를 발행할 권한을 위임하는 전보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임시의정원 폐회 전날인 7월18일에 의원들이 정부당국자가 출석해 보충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안창호가 국무총리 대리 자격으로 출석, "현재 임시정부의 형편이 금전이 급히 요구되는 상태이므로 국채를 발행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날 가결됐다.

그러나 1925년 3월21일 심판위원회 명의로 작성된 심판서에 따르면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면직 이유중 하나는 미주의 동포들로부터 거둔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공채가 독립의 자금줄 = 공채로 모은 자금은 독립운동에 대거 투입됐다. 독립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한국광복군 창설 등은 공채 등의 효과가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다.

1919년 11월 29일 독립공채 조례를 비롯해 공채표발행규정, 공채모집위원규정 등을 제정, 공포했다. 임시정부는 이자율 연 5%의 원화 독립공채와 연 6%의 달러 독립공채를 1919~1948년까지 29년간 발행했다. 공채 액면금액은 1000원, 500원, 100원의 원화 3종류와 1000달러 100달러 50달러 25달러 1달러 등 달러화 5종류를 냈다. 독립후 5년~30년사이에 원리금을 갚겠다는 게 조건이었다.

중경시기 임시정부의 세입세출결산서를 보면 미주동포의 송금으로 추산되는 총세입은 1940년 약 20%인 3만7642원, 1941년 약 40%인 22만3494원, 1942년 약 44%인 46만3872원, 1943년 15%인 40만9927원이었다. 한국광복군의 창설도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으로 이뤄졌다. 백범일지에는 "미주 하와이 동포들이 원조한 3만~4만 달러 등 모든 역량"을 다한 자력창설이라고 했다.

한편 정부는 1983년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 조치법안'으로 독립공채를 상환키로 했다. 2000년 12월 31일까지 신고된 건수는 57건으로 모두 3억4241만원어치가 상환됐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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