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① 전개과정

일제 감시 뚫고 '순종' 인산날 학생들 곳곳서 릴레이식 시위

2019-06-10 13:33:20 게재

3.1운동처럼 추진, 사전 발각돼 독립운동 조직·계획 무너져 … 당일 중앙고보·중동학교·연희전문 중심 8곳서 시위

6.10만세운동(6.10)이 일어난지 올해로 93주년을 맞았다. 6.10은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이라는 민족의 공동목표를 위해 이념을 초월해 일으켜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계에서는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함께 6.10을 일제강점기 국내 3대 독립운동으로 꼽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6.10은 상대적으로 낯선 게 사실이다.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말에 이어 10일 오후 학술대회를 열었다. 내일신문은 기념사업회의 노력에 뜻을 같이 하고 학술대회를 통해 소개된 연구 성과들을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 인산일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그 방법과 형태에서 3.1운동의 경험을 계승하고 있었다. 운동의 주체들은 4월 26일 융희황제 승하 직후 3.1운동 때와 같이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지만, 거사 직전인 6월 7일, 사전 발각되면서 그 조직과 계획이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서울에서는 중앙고보를 비롯한 중등학생들과 전문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추진되면서 인산일 당일 여덟 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시위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들만도 200명이 넘었다.

1926년 순종 인산일에 맞춰 거사를 계획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체포되자 검거망을 피한 학생들이 비밀리에 만세시위를 조직했다. 중앙고보, 중동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의 학생들은 6월 10일 순종 대여 행렬 흐름에 맞춰 미리 준비한 격문과 태극기를 뿌리고 만세를 외쳤다. 사진은 순종 대여 행렬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당초 6.10만세운동의 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만세운동의 첫 출발점인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앞장 서 일으키고, 지방에서는 망곡과 봉도(奉悼)에 참가하는 대중들을 결집해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는 7년 전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6.10만세운동의 선언서인 '격고문'에서도 3.1운동을 만세운동의 시원으로 표명했듯이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3.1운동 기반한 '제2의 만세운동' = 그렇다고 6.10만세운동이 3.1운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3.1운동과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3.1운동 때와는 다른 정세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운동이 1차 대전 후 인도주의의 부상과 함께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한층 공고해진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또 3.1운동의 계획 주체가 종교 지도자였다면, 6.10만세운동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해 천도교, 조선공산당, 중등학생 등 다양한 성격의 주체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주체들이 사상적 이념을 초월해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점이다. 3.1운동이 종교 이념을 초월했다면, 6.10만세운동은 정치사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이 3.1운동처럼 전 민족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것은 운동 주체의 한계보다는 당시 국내외 정세와 식민지배의 폭압적 통치에 기인한 바가 컸다. 이 무렵 국제정세는 제국주의 간에 안정 기조를 이루며 상대적으로 식민지 지배가 공고하던 상황이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에 의해 국내 정세도 개량화가 촉진되면서 민족세력이 분화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거기에 3.1운동으로 식민지 통치 방식을 수정할 만큼 충격을 받았던 일제가 융희황제 국상을 당해서는 3.1운동 때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사전에 철통같은 경계와 탄압적 봉쇄를 펼쳐 나갔다. 3.1운동 때 일제는 만세운동의 조짐을 민족감정이 일시적으로 동요하는 것으로 오판하다가, 뒤늦게 만세운동의 불길이 확산된 뒤인 3월 7일에서야 만세운동 진압에 나선 바 있었다.

때문에 일제는 융희황제 승하 때에는 철저하게 원천 봉쇄하는 대책을 세우며 군경을 동원했다. 일제는 융희황제가 승하하기 이틀 전인 4월 23일부터 돈화문 앞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설치해 일경·기마순사·헌병 200여명을 배치하는 한편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던 탑골공원에 중무장한 기관총 소대를 배치했다. 거기에 융희황제 승하 사실까지 다음날 오후로 미루면서 서울 인근 지역의 일경을 총동원하며 경계를 강화했고, 전국 각처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서울 시내를 포위한 채 무장시위를 감행했다. 또 만일에 대비해 각도에서 3500명의 경찰을 차출해 서울에 배치하고, 헌병대사령부는 나남, 함흥, 평양 등지에서 헌병을 동원해 경찰의 경계를 지원했다. 그것도 모자라 인산일 당일에는 인도에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킨 채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6.10만세운동 거사 계획이 드러나자 일제는 경찰과 군대 총동원령을 내려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은 장례행렬이 지나갈 연도를 감시하고 있는 일본 군경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 군경 탄압에 대한 승리 = 그런 정황을 놓고 볼 때, 6.10만세운동은 일제가 총력적으로 펼친 군경의 경계와 탄압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이를 꽃에 비유하면, 3.1운동이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날 만개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인동초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6.10만세운동은 만세시위의 규모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6.10만세운동으로 일제 당국이 받아야 했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 충격은 조선총독부의 차원을 넘어 일본 본국으로까지 파급되었다. 일본의 식민주의자들은 6.10만세운동이 그간의 식민지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며, 조선총독부를 질타하고 나섰다. 조선총독부가 이례적으로 6.10만세운동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은폐 왜곡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초 조선총독부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뿌리까지 찾아 관련자들을 '엄벌'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했으나 그렇게 될 경우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만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을 우려해 축소, 왜곡했던 것이다. 즉 소수의 열혈 학생들이 울분과 감정에 의해 일으킨 만세시위로 분장시키며, 진실을 감추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왜곡은 안타깝게도 광복 후로 이어지며, 6.10만세운동의 역사상이 오랫동안 일그러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을 정립하기까지 반세기를 넘겨야 했다.

6.10만세운동은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초월해 연대를 이뤘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19년의 3.1운동이 민족독립을 위해 종교이념을 초월했다면, 7년 뒤의 6.10만세운동은 정치이념을 초월해 전개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6.10만세운동에 참가하거나 관여했던 단체나 세력은 해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해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임시정부의 외곽조직인 병인의용대, 국내에서는 천도교와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통동계'의 학생층 등이었다.

◆독립운동가들 대거 검거 = 이들은 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밀접하게 연대를 이루며 서로의 역할을 분담해 나갔다.

만세운동의 계획이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구상된 가운데, 국내에서는 권오설을 비롯한 지도부가 만들어졌다.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 및 지방 연락을 맡았으며, 학생층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는 만세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거사 직전인 6월 7일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 선언서의 인쇄를 천도교의 개벽사에서 맡았는데, 우연히 일경의 감시망에 걸려 탄로가 났던 것이다. 이로서 천도교당 현장에서 천도교 및 개벽사 등 관련 인사 80여 명이 체포된 것을 비롯해 사회단체 인사들 200여 명이 붙잡히면서 거사 계획이 좌절되기에 이르렀다.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일경의 검색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으로도 확대되었다. 전국의 주요 도시 정거장마다 지방으로 배송되는 물품을 샅샅이 검색하는 한편 경기도 경찰부는 연일 긴급통보를 발하며 주요 각처에 일경을 파견해 관계자들을 검속하고 체포했던 바 2, 3일만에 각 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의 총동원령을 내리며 어떤 낌새가 있지는 않을까 일반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나갔다. 사상단체, 종교단체, 학교 등에 대한 검속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역과 여관 음식점 등에 이르기까지 출입자에 대한 검문 검색도 강화해 갔다.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던 날 조선 총독은 정무총감을 대동하고 직접 조선군사령관을 만나 긴급대책을 강구할 정도로 총력적이고도 전면적인 탄압을 가해 왔다.

그러나 긴박한 위기 상황에서도 일제의 검거망을 피한 학생들의 만세운동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만세운동 당일 사용할 격문과 태극기를 지휘부와 천도교 측에서 제공키로 했으나, 사전 발각으로 차질을 빚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들은 사직동 이석훈의 하숙집과 연희전문학교 뒷동산에서 급히 격문을 인쇄하는 등 거사를 준비해 갔다. 그리고 만세운동 하루 전에는 학생들이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가며 각 학교와 지방에 격문과 전단을 배포할 수 있었다. 이런 학생층의 성공적인 거사 준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제의 총공세에 맞서 이뤄낸 값진 승리나 다름없었다.

◆8곳에서 릴레이식 거사 = 인산 당일 장례 행렬이 지나갈 연도 양측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2만1000여명의 중등 이상 학생들이 도열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돈화문에서 을지로에 이르는 도로의 동서양편으로 고등보통학교생과 전문학교생 1만4000여명, 을지로 2가에서 4가까지 남북도로변에 7000여명의 남녀학생이 배치된 것이었다. 일군경은 만일에 대비해 학생들이 도열한 앞뒤로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로 에워싼 채 엄중한 경계와 감시를 펼쳤다. 총독부 경무국은 각급 학교의 도열 학생들에 대해 세세한 주의사항까지 시달했다. 즉 인산행렬이 끝나는 대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사의 책임아래 해산시킬 것을 강력히 지시했고, 당일에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겹겹히 경계망을 구축하고 나섰다.

인산일이 다가오자 서울의 거리는 마침 조선박람회의 구경거리와 조선의 마지막 인산을 구경하고자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울역에서 승하차한 인원만도 6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에 무려 8만여 명에 달했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5배나 많은 규모였다. 여기에 용산, 청량리, 왕십리역까지 합치면 10만명을 훨씬 넘었다. 장례가 통과하는 연도에는 30여만 명이 운집해 있었는데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전 8시반 종로 3가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 모두 여덟 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단성사 앞의 시위 : 오전 8시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 행렬이 통과한 뒤 동양루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40명이 격문서 1000여장과 태극기 30여매를 살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러자 연희전문 학생들이 호응하면서, 일대가 만세시위 현장으로 떠들썩했다. 만세 소리에, 대여 뒤에서 따르던 기병의장대의 말이 놀라 달리는 바람에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다가 중경상을 입은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때 만세를 고창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학생은 연희전문학교 김규봉, 이석훈, 중앙고보 이동환, 박선석, 홍명식, 주공조 등 50여 명에 달했다.

② 오전 8시 40분 대여가 지난 직후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등 50여명이 격문서를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과 연희전문 박하균, 이천진이 앞장 서서 격문을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이때 일경에 의해 주동인물인 이병립 · 박하균 · 이천진을 포함하여 학생 40여명이 붙잡혔다.

③ 오전 9시 반 경에 청년학원 생도 박두종 외 2명의 청년이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격문 1000여 장을 살포하며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이루어져 부근의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박두종은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④ 오후 1시 경 훈련원 재전 부근에서 학생 1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했다. 훈련원 서쪽 일대에서 천세봉의 선창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⑤ 오후 1시 10분경 동대문 부인병원 앞에서 대여가 지나간 후 시대일보 김락환외 2명이 격문서를 뿌리며 만세를 고창했다.

⑥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가량의 사람이 만세를 고창했다. 홍종현이 혈서를 쓰고 투쟁에 참가했다.

⑦ 오후 1시 45분 경 대여가 신설동 고무회사 앞을 지나갈 때 학생 1명이 격문서 100여장을 살포했다.

⑧ 오후 2시 20분 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학생 4명이 관수교 부근에서 살포한 것과 같은 격문서 7백여 장을 살포했다. 살포한 학생은 '통동계'의 박용규, 곽대형, 황정환, 이동환 등이었다.

◆학생 600여명 만세운동 주도 =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마치 릴레이 하듯이 일어났다. 그것은 학생들의 사전 계획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학생들은 가슴에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격문을 군중을 향해 힘차게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의 그토록 삼엄했던 경계와 철통같은 감시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여덟 곳의 만세시위에는 500~600여명의 학생들이 주동적으로 참가했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했다. 그리고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0~80여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창신동 입구에서는 홀홀단신으로 혈서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한 홍종현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아래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군중가운데 몇몇 만이 호응할 뿐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 치러졌다.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만 210여명에 달했다. 이때 체포된 학생들을 학교별로 보면, 연희전문 42명, 세브란스의전 8명, 중앙고보 58명, 보성고보 7명, 그밖에 중동학교, 양정고보, 배재고보, 송도고보 학생들이었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장석흥 교수(국민대 한국역사학)가 주제발표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위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편집 편의를 위해 각주 등을 생략했습니다. 원문은 6.10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610manse.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6.10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