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③ 20년대 학생운동과 6.10

3.1운동이 도화선, 6.10만세운동으로 총결산

2019-06-17 11:26:32 게재

거족적 만세운동에서 행동대 역할 수행

조직 결성으로 연결, 독립운동 한몫 담당

6.10만세운동(6.10)은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이라는 민족의 공동목표를 위해 이념을 초월해 일으켜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계에서는 학생들이 6.10을 주도한 것은 우발적 상황이 아니라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경험과 전국 규모 단체 등장 등 보다 활발해진 1920년대 학생운동의 총결산 성격이라고 평가한다.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이런 6.10의 역사적 재평가를 위해 지난해 말에 이어 10일 오후 학술대회를 열었다. 내일신문은 기념사업회의 노력에 뜻을 같이 하고 학술대회를 통해 소개된 연구 성과들을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국에서 학생계를 대표하는 전국적 학생조직이 완성되어 학생운동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3.1운동 이후부터였다. 3.1운동 과정에서 학생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도화선을 놓고 만세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령 역할을 하였다.

먼저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것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월 8일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와 각 신문사에 보내는 한편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물꼬를 텄다. 국내에서도 학생들은 학생YMCA와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 출신의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주축으로 2월 20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학생단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이 때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사이에 독립운동 일원화 교섭이 무르익어 단일 대오를 형성하기에 이르자 학생단은 2월 25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제2회 간부회를 열어 그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 도로변에 세워진 '6.10독립만세운동 선창터' 표지석. 사진 이의종

◆3.1운동 후 전국조직으로 확산 = 이후 학생단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대중동원의 책임을 맡아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탑골공원(당시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전날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김에 따라,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 역전에서의 학생단 주최 만세시위는 물론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 또한 사실상 학생 주도하에 치러졌다. 평양을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도 학생들은 독립만세시위의 선봉대로 나섰으며, 비밀리에 전단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진행상황을 일반에게 알리고 전국 각 지역으로 운동을 확산시키는 전령 역할을 하였다.

이후 기존의 학교 단위 교우회(동창회)나 학우회, 출신지역별 학생친목회나 유학생회를 뛰어넘어 학생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학생운동단체의 결성을 도모하였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전후 맥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서 일선 행동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학생계층의 사회적 위상과 그들에 대한 기대가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3.1운동을 통해 학생들은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며 민족의식과 사회적 책임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고, 일반인들 또한 그 같은 학생들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둘째, 3.1운동을 계기로 집단적 수준에서의 정치적 실력양성이라는 동기와 개인적 수준에서의 상향적 사회이동의 기회 포착이라는 동기가 접합되어 근대의식의 확산과 신식학교 취학율의 증가가 나타나면서 학생인구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1923년을 기점으로 보통학교 학생수가 서당 학생수를 앞지른 데서 나타나듯이 3.1운동과 더불어 종래의 봉건적 신민의식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민의식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고조된 민간의 교육열은 학생계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3.1운동 직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신임 조선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치' 표방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자유의 제한적 허용 또한 전국적 학생운동단체 출현에 중요한 외적 환경을 조성하였다. 일제는 '문화의 창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을 내세워 일련의 유화적 조치를 취하면서, 지역 계층 간의 분열을 유도하고 친일세력을 육성하는 민족분할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일궈낸 값진 전리품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다소나마 열린 민족운동의 공간을 통해 학생계를 대표할 단체 결성의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는데,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망라하여 출범한 조선학생대회는 그 첫 열매였다.

6.10만세운동 관련자들이 재판장에 입장하는 장면을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일제, 조직 확장 탄압 = 조선학생친목회는 1920년 4월 18일 발기를 통해 본격화하였다. 이날 조선학생친목회 발기총회에서 학생들은 지육, 체육, 덕육의 발달을 도모하여 일반 학생의 분산된 사상을 통일 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단체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발기인들의 분투와 각계각층의 호응 속에 창립사무를 진행하여 회의 명칭을 조선학생대회로 바꾸고, 1920년 5월 9일 오후 1시 정동교회 예배당에서 성대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에 들어 3.1운동을 통해 고양된 학생들의 민족적 자각과 사회 일반의 교육열에 힘입은 학생수의 증가, 그리고 문화통치 하에서 제한적이나마 열린 민족운동의 공간을 바탕으로 학생 주체적인 조직 결성이 다각도로 모색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은 조선학생대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비로소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 학생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도화선을 놓고 만세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령 역할을 하였다. 이를 통해 축적한 역량을 발판으로 일제의 문화통치 표방으로 다소나마 열린 민족운동의 공간을 활용하여 학생계를 대표할 대중단체의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는데, 1920년 5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망라하여 출범한 조선학생대회는 그 첫 열매였다.

조선학생대회는 3.1운동을 거치며 고양된 민족의식과 문화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자극 받아, 단체적 훈련을 통한 학생들의 지덕체에 걸친 인격수양과 학생계의 건실한 풍기 확립 및 사상 통일을 목적으로 표방하면서 당대 문화운동의 일역을 담당하였다. 출범 이후 학생대회는 강연회, 토론회, 운동회, 음악회, 연극회, 지방순회강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전국을 돌며 벌인 하기 순회강연은 문화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조선학생대회의 가장 큰 행사이자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이렇게 조선학생대회가 학생계를 대표하는 문화운동의 선두주자로 떠오르자, 일제 당국은 서울시내 7개 중등학교 교장회의로 하여금 학생대회 입회 금지를 결의토록 하였다. 이로 인해 중등학생 회원들이 탈퇴가 잇따르는 등의 타격을 받은 학생대회는 결국 1922년 11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단체를 해산하고 전문학교 학생만으로 조선학생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학생대회의 후속조직으로 발기된 조선학생회는 곧바로 창립 작업에 들어가 1923년 2월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학생회는 학생의 단결 도모와 실력 충실을 목적으로, 학생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강연회, 웅변대회, 운동회, 음악회 등 문화운동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 유입, 노선 갈등 = 1924년 4월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청년총동맹이 출범하여 청년운동의 단일대오를 형성함에 따라 조선학생회는 사상 노선상의 갈등에 휩싸였다. 조선학생회의 간부 몇몇이 중심이 되어 조선학생총연합회 발기준비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된 분규는, 문화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학생간의 친목기관으로 조직된 조선학생회와 사회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좀 더 구형적인 선전기관을 지향하는 학생총연합회간의 학생운동 사상노선상의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후 조선학생회는 1925년 1월과 5월 두 차례나 예정했던 제3회 정기대회를 연기한 채 비상체제하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는 사이 학생운동의 지형도 동맹휴학과 독서회를 비롯한 비밀결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학생 사상운동단체들이 등장하면서 크게 바뀌어 갔다. 안팎으로부터 도전이 거세어지는 속에서 조선학생회는 1925년 11월 미뤄왔던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사회적 발언을 강화하였다.

1926년 2월 제4회 정기총회는 6.10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병립을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병립은 앞서 신흥청년동맹과 조선학생회총연합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한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청년학생운동 지도자였다.

이병립 집행위원장 체제하에서 조선학생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적 학생 사상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사무소를 같이 쓰며 활동 면에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 두 단체는 대중단체와 사상단체로서 각자의 위상에 걸맞게 역할을 분담하며 공조하는 체제를 만들어갔다.

한편 1925년에 들어 학생계는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최초의 학생 사상단체로 공학회가 창립되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서울학생구락부, 경성학생연맹이 그 뒤를 이으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들 단체는 주요 사업으로 월례회와 독서회, 학생문제 강연회와 고학생 후원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당시 사회주의 세력 내부의 역학관계를 반영하여 공학회―서울학생구락부(북풍회계), 조선학생총연합회―경성학생연맹(서울청년회계), 조선학생과학연구회(화요회계)가 정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6.10, 이념 떠나 한 목소리 = 이 가운데 1925년 9월 발족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하며 1920년대 후반 학생계를 이끌어 간 대표적 학생 사상단체였다. 학생과학연구회는 '학생의 사상통일과 상호단결' '인간본위 교육의 실현'을 강령으로 하여 학생도서관 설립운동, 과학문제 강연회와 과학강좌의 개최, 지방 하기대학과 농촌강좌 설치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사회과학의 연구 풍조를 지방으로 확산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여 전국 각지에 학생 사상단체가 결성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학생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성립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 과정에서 세칭 '사직동계'의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며 한국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거사 준비에 들어간 것은 1926년 5월 3일 고려공청 간부로 조선공산당 학생부 프락션에 소속되어 있던 이병립이 6.10만세운동의 총책임을 맡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로부터 거사계획과 투쟁지침을 전달받으면서부터였다.

이후 이병립은 이선호, 이천진 등 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과 수차례 모임을 갖고 인산 당일의 학생 동원과 가두 행렬에서의 만세 선창과 격문 살포 같은 시위 방법에 대해 논의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5월 20일 각 학교 학생대표들을 소집하여 거사 방법과 자금 조달 등에 대해 구체적인 역할을 분담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하던 세칭 '통동계' 학생들과 연락을 시도해 사전 조율을 하였다. 조선학생회 역시 이병립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사 준비와 무관치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면에서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전반 학생운동의 총결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글은 10일 서울 종로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6·10만세운동과 민족통합'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장규식 교수(중앙대 역사학과)가 발표한 '1920년대 전반의 학생운동 단체의 변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편집 편의를 위해 각주 등을 생략했습니다. 원문은 6.10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610manse.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재평가

[6.10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