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위상 재평가

2019-06-17 11:26:32 게재

1926년 순종황제의 인산을 기회로 하여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일제하 국내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꼽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이나 11.3학생운동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왔으며, 따라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도 못했고,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도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

그동안 중앙고등학교에서 학교 차원의 기념식만을 거행해 왔으며, 중앙고 학교 정원에 기념비가 하나 서 있을 뿐이다. 6.10만세운동이 이렇게 저평가되어도 옳은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측에서 준비하다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학생층이 준비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연희전문과 보성전문과 같은 전문학교생, 그리고 중앙과 중동의 중등학교생들이 연대하여 이 운동이 성사되었는데, 만세운동이 그 이상 크게 확대되지 못한 것은 천도교와 조공이 준비하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 외에도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비와 밀정들의 활발한 활동 등 당시의 여러 엄혹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군경은 순종 인산 당일에 서울 시내에 삼엄한 경비를 폈다. '동아일보' 6월 10일자 기사에 의하면 용산의 조선군 20사단 병력 가운데 보병, 기병, 포병 5000명이 서울 시내로 나와서, 3.1운동의 진원지인 파고다공원에 아예 본부를 차려놓고 서울 전역을 계엄 상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당시 헌병들은 10~20명으로 대오를 이루어서 시가지를 순찰한다면서 시위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중앙고보생 이동환의 회고에 의하면, 인산 행렬은 8시에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로 3가를 거쳐 관수교를 건너 을지로 3가에서 왼쪽으로 꺾어 9시 30분 훈련원 봉결식장에 이르러 봉결식을 거행하고 노제를 지낸 다음, 오후 1시에 다시 출발하여 동대문으로 나가서 청량리를 거쳐 금곡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때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은 돈화문 앞에서부터 을지로 4가까지 연도 양쪽에 도열하여 봉도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도 맨 앞에 도열한 학생들의 등 뒤에는 일반인이 도열해서 혼잡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연도의 이 도열 앞과 뒤에는 정사복의 경찰이 10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배후의 큰 길에는 기병, 기마헌병, 기마순사, 무장군인들이 유사시에 대비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계엄 상태나 다름없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단성사 앞에 있던 중앙학교생 이선호는 인산 행렬이 지나가자마자 학생들의 도열 앞에 서서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에 옆에 있던 이동환은 격문을 사방으로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용규, 최제민, 유면희 등도 역시 마찬가지로 격문을 뿌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경찰 여러 명이 우선 이선호를 체포하여 자동차에 태워 보냈다. 이어 경찰들은 이동환을 닥치는대로 두들기고 이마를 만년필로 마구 찔러서 이동환은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은 관수교 부근 동편에 도열하고 있다가 인산 행렬이 지나가자 이병립과 박하균이 학생들의 도열 앞으로 나아가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에 김규봉, 권오상, 한일청, 이석훈 등이 호응하였다.

중앙기독교 청년학관의 박두종은 을지로 5가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경성제대 예과 이천진은 훈련원 봉결식장 뒤에서, 중동학교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은 오후 2시경에 동대문 바께 숭인동 동묘 뒤에서 인산 행렬이 지나간 직후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시위에서 체포된 학생은 동아일보에 의하면 종로서에 150명, 동대문서에 50명, 본정서에 10여명 등 200여명에 달했다. 종로서에 연행된 학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이 43명, 중앙고보생이 58명, 세브란스의전 학생이 8명, 보성전문 학생이 7명, 양정학교생이 2명, 배재학교 학생이 1명, 기타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훗날 재판에 넘겨진 학생은 11명에 그쳤는데, 많은 수를 재판에 넘길 경우 사건의 파장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서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6월 10일을 앞두고 각 지방의 수많은 청년단체,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었다. 지방에서 직접 만세시위를 한 것은 6월 10일 고창보통학교 학생들의 요배식 귀환 도중의 만세시위와 인천 만국공원에서의 청년 수십 명의 시위가 있다. 그러나 비록 시위에는 실패했지만 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만들어 붙인다든가, 만세운동을 벌이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통학교에 보낸다든가, 태극기를 만들어 게양함으로써 봉도의 뜻을 표한다든가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요배식을 전후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게양하거나 흔들면서 봉도의 뜻을 표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곳곳에서는 봉도식이 열렸고, 또 많은 이들이 곳곳에 모여서 통곡하는 망곡을 했다. 또 봉도를 금지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지방의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은 봉도와 망곡, 맹휴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6.10만세운동은 서울에서의 사실상의 계엄 상태 하에서의 만세시위, 그리고 지방에서의 만세운동, 봉도식, 망곡, 맹휴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6.10만세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좌우파가 함께 이 운동을 기획하였다는 점, 학생들은 만세시위와 맹휴로, 일반인은 봉도와 망곡으로 항일의 의사 표시를 하였다는 점 등에서 일제강점기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서 그 위상이 확고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6.10만세운동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정부 차원에서 기념행사를 함으로써, 한국인의 기억 속에 그 자주독립의 정신을 남기는 것은 당연하고 또 필요하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박찬승 교수(한양대 사학과)가 발표한 '6·10만세운동의 전체적인 모습과 역사적 위상의 재평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편집 편의를 위해 각주 등을 생략했습니다. 원문은 6.10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610manse.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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