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계 WTO개도국지위 포기 논란

2019-09-09 11:02:11 게재

농민단체 "개도국 유지해야" … GS&J "포기 안하면 큰 부담"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문제에 대해 농업계 내부 의견이 갈라지고 있다. 농민단체들은 '반대', 연구단체는 '수용', 농림축산식품부는 '신중'론을 펼치고 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6일 성명서를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WTO 농업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요구에 따라 한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를 검토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 산업통상자원부를 겨냥했다.

한농연은 성명에서 "우리나라는 농업 분야에만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고 있으므로, 개도국 지위 포기에 따른 피해는 온전히 250만 농민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개도국 지위를 상실할 경우 관세 감축 폭이 선진국 수준으로 커지고, 농가의 농업소득 보전을 위한 각종 보조금 지급 한도도 축소될 수밖에 없어 농가의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특수성을 인정받아 고율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참깨 대두 녹두 등 소규모 경종작물과 식량작물의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했다.

한농연은 "소규모 경종작물의 경우 노동집약적 작물이 대다수로 국내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마저 포기하면) 자칫 생산기반 자체가 붕괴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축산관련단체협의회도 같은 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축산업 포기 선언"이라며 정부를 규탄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관세 감축 폭이 커지고, 민감품목과 특별품목의 허용범위가 줄어드는 등 국내 농축산물이 경쟁력을 갖추기도 전에 세계농축산물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축산업에 위기가 닥쳐도 정부가 도와줄 방법이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국내 대표적인 민간 농업·농촌 연구단체인 지에스앤제이(GS&J)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GS&J는 6일 발표한 'WTO 개도국 지위 문제와 우리의 선택'이라는 보고서에서 "차기 라운드(WTO 협상)에서는 식량안보에 필수적인 소수 품목을 제외하고 개도국 지위를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절한 시점에 선언"할 것을 제안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거론하며 개도국 지위 포기를 종용한 것은 미국의 경제적 실익과는 관계가 없고 중국의 개도국 졸업을 압박하는 데 한국이 동참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게 목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과 이정환 GS&J 이사장은 "개도국 졸업 선언의 실질적 비용은 없거나 크지 않은 반면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통상관계는 물론 현재의 동북아 정세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GS&J는 세계 각국은 1995년에 이루어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따라 시장개방과 보조금 감축 등을 이행하여 현재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우리나라가 당장 개도국 졸업을 선언해도 현재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가 나타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개도국 졸업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은 도하개발어젠다(DDA) 또는 새로운 농업협상이 타결되고, 그에 따라 각국이 이행계획서를 제출·검증한 후, 비준 등 국내적 절차를 마무리한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광범위한 자유무역협정(FTA)이 이행되고 있어 WTO 양허관세의 의미도 점점 낮아진다는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미국 및 유럽연합(EU) 사이에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철폐가 진행 중이고, 세계 52개국과 FTA를 맺어 WTO 수준을 초과한 시장개방을 이행하고 있다.

중국과의 FTA는 낮은 단계로 타결됐지만 현재 진행 중인 역내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되면 중국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이 이루어지게 되고,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김현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국이 국제 통상의 농업 부문에서 지금처럼 개도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장관은 당시 "개도국 지위가 주는 혜택이 큰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경제력 등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4가지 조건 때문에 (개도국 지위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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