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자기혁신 과연 가능할까

2019-09-10 11:50:46 게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9일자에 따르면 88세 미국 변호사 마틴 립튼은 1965년 '와첼 립튼 로젠 & 카츠'라는 로펌을 공동설립했다. 그는 1982년 '포이즌필'(poison pill)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할 경우 기존 주주들이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립튼은 FT와의 인터뷰에서 "난 자본주의를 믿는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수십년 동안 미국의 기득권과 싸우고 있다. 이유는 그가 1979년 쓴 논문 '목표 기업 주식의 공개매입'(Takeover Bids in the Target's Boardroom)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그는 논문에서 기업 경영진과 투자자는 '주주'(shareholder)의 단기적 이익보다 노동자 고객 공동체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장기적 가치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유럽 대륙이나 일본은 오랫동안 이해관계자를 중시한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립튼의 주장은 이들 나라에서 별 다른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변호사와 학계, 투자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는 "아무도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지난달 181명의 미국 최고경영자들이 모였다. 미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다. 이들은 '기업의 목적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기업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헌신해야 한다"며 "주주 우선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집착을 포기하자"고 촉구했다.


환경, 사회운동가들은 반색했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와 투자자들은 "기업들을 법적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며 격앙했다. 우파 전문가들은 'BRT가 자유시장에 기반한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고 비난한 반면 버니 샌더스와 같은 좌파 정치인들은 '고액연봉을 받는 CEO들이 위선을 떨고 있다'고 지적했다.

FT는 "이 논쟁은 여러가지 질문을 제시한다"며 △미국 기득권층이 왜 지금 자본주의에 의문을 던지는가 △월가는 립튼의 이단적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경제성장 또는 포퓰리즘 물결에 어떤 파장을 줄까 등을 짚었다.

립튼은 "나는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기업이 이해관계자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만약 지금 당장 바꾸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향후 50년을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이 논쟁에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다면 '기업'(컴퍼니·company)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오늘날 기업이라 하면 재무상태표, 현금흐름 등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company는 12세기 프랑스어 '꽁빠니'(compagnie)에서 유래했다. 사회, 우정, 친밀함, 군대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이 말은 라틴어 '콤파이오'(companio)로 거슬러 올라간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치면 '식구'(食口)다. 무역, 상업이라는 뜻의 '커머스'(commerce)도 애초엔 '사회적 연대'라는 의미였다.

원래 의미들은 수세기 동안 변함 없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 애덤 스미스가 '시장'(국부론)과 '도덕'(도덕감정론)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어떤 모순도 없다고 쓸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컴퍼니의 의미가 변했다. 립튼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상대, 노벨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이 변화를 주도했다. 프리드먼은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을 냈다. 기업은 대중이나 사회에 대해 그 어떤 사회적 책임도 없다는 것, 오로지 주주들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1970년대 여러 차례 발표글에서 "자유로운 민간 기업이 활동하는 사유재산 시스템에서 경영진은 기업의 주인이 고용한 직원이다.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기본적 책임을 진다"고 지적했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광범위한 혁명을 촉발했다. 정치적으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이 프리드먼의 생각을 빌려 급진적인 자유시장 정책을 내놨다. 경영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기업들은 '이익은 사업활동에 재투자돼야 한다'는 20세기 초 이래의 신념을 버리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학계에서 유진 파마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자유로운 시장이야말로 경제성장과 가치 증진의 유일한 동력'이라고, 루시언 베브척과 같은 법학자들은 '기업 이사회는 투자자(주주) 의견을 거부할 어떤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월가에서는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금융인과 변호사, 경영컨설턴트들이 프리드먼의 패러다임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주가치를 최우선하는 새로운 수익모델을 궁리했다. 그러자 적대적 인수합병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월가 금융인들은 약점을 보이는 기업을 볼 때마다 단기적 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주식을 집중 매집했다. 이들은 프리드먼, 나아가 스미스의 이름을 내걸고 기업 사냥에 나섰다.

시장만능주의 풍조

1979년 1월 아메리칸익스프레스(아멕스)가 교육출판기업 맥그로힐을 상대로 8억8000만달러의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다. 립튼은 당시 맥그로힐을 방어하기 위해 변호인으로 고용됐다.

월가와 립튼에게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1931년 대공황 시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월가를 뒤흔들 것으로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 하지만 기업사냥꾼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립튼은 틈새를 찾아냈다.

아멕스의 적대적 인수는 애당초 돈이 목표였다. 아멕스는 주주들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맥그로힐 이사회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으로 고용된 립튼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당시 대세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먼을 직접 공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앞서의 논문 '목표 기업 주식의 공개매입'에서 "한 국가의 기업 시스템, 경영 시스템의 장기적 이해관계가 투기꾼들을 배불리기 위해 망가지고 있다. 기업의 활력이나 계속기업으로 존속하는 가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식을 매집해 단기간에 팔아치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사냥꾼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아멕스는 적대적 인수 시도를 포기했다.

델라웨어 주법원은 1985년 석유화학기업 '유노컬'과 '하우스홀드인터내셔널'(현 HSBC파이낸스)의 적대적 인수 관련 재판에서 립튼의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델러웨어 법원은 화장품 회사 '레블론'의 재판에서는 주주 우선주의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1992년 미 증권거래위원회도 주주 우선주의 활동가들의 입장을 찬성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더 중요한 건 기관투자자들이 주주가치를 최대화하는 데 목적을 둔 투표권대리 대행기업에 투표권을 위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4년 연기금 업계는 주주 우선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자체 규정을 내놨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주주 우선주의 개념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립튼이 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진들을 보호하려는 것은 비민주적이며 자신의 사업을 위해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립튼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인 바 있는 베브척 교수는 "주주 권리는 경영자와 간부들이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프리드먼 학파는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승리를 거뒀을 뿐 아니라 이해관계자를 중시하는 일본이나 유럽 대륙보다 더 강력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면서 주주 우선주의의 가치를 입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종종 그렇듯, 프리드먼 학파의 승리는 동시에 불신의 씨앗을 뿌리는 시점이기도 했다. 최근 몇년 동안의 금융시장 호황은 주로 초저금리와 탈규제 등 '자유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믿음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같은 시장만능주의 풍조에 월가마저도 '지나친 게 아니냐'며 불안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안을 찾아나선 사람들

제이 코언 길버트와 바트 훌라한, 앤드루 캐소이는 1990년대 '앤드원'(AND1)이라는 야구의류업체를 공동 설립했다. 그러다 2005년 아메리칸스포팅굿즈에 거액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다. 미국의 기업가들이 일반적으로 돈을 버는 사례다. 하지만 거래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주인은 무지막지한 구조조정에 나서 회사 자산 대부분을 매각했다. 길버트와 훌라한, 캐소이는 이를 보고 경악했다. 회사의 존속, 임직원의 미래 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버트와 동료들은 이런 사례를 막을 수 없는지 고심했다. 하지만 델러웨어 주법 체제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고안했다. 이해관계자를 보호할 새로운 법적 체제를 만들어보자고 의기를 투합했다. 캐소이는 "우리는 기업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2006년 새로운 기업형태를 만들었다. '베너핏 기업'(Benefit Corporation)으로 명명하고 델러웨어 주법원에서 인가를 받았다. 기업은 주주뿐 아니라 노동자 지역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위해 환경·사회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신용확장으로 인한 호황기에 기업의 구조를 뜯어고치려는 경영진은 없었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이해관계자까지 고려할 경영자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2010년 흐름이 바뀌었다. 비록 대기업은 관심을 덜 가졌지만, 많은 중소기업들이 베너핏 기업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 사회 등으로 실적을 평가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캐소이는 "기업들이 갑자기 잠에서 깬듯 기업가치와 실적을 평가하는 방식을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이유는 뭘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무제한적인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한편으로는 환경적 리스크가 기업의 실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투자자와 경영자의 깨달음도 있었다. 하지만 제3의 요인은 정치였다. 2008년 위기로 미국의 경영, 정치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고조됐다. 대부분의 경영자는 경기침체가 끝나면 대중의 분노가 곧 사라질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경기가 호황으로 반전됐지만, 소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

물론 대중의 분노 중 일부는 이민자, 글로벌화를 겨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들은 좌불안석을 느끼고 있다. 40년 가까이 주주 우선주의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에 비해 자본이, 직원에 비해 경영자가 너무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가 고착됐다. 2007년 최고경영자의 보수는 평균 직원 보수의 345.9배였다. 1978년엔 29.7배에 불과했다. 기업의 규모와 이익이 커지면서 나라 전체의 경제성장 과실이 계속 늘어났지만 노동이 차지하는 몫은 계속 줄어들었다. 반면 투자자에 대한 보상은 치솟았다. 현재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세후이익의 거의 100%다. 하지만 1972년 이 비율은 24%에 그쳤다. 나머지는 기업의 미래를 위해 유보하거나 직원들과 나누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누구도 이런 구조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성공스토리가 과연 무엇인지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2017년 한 여론조사에서 1980년대 초반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세대의 44%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월가 경영자와 금융인들은 자기방어 수단을 찾기 시작했다. 이동통신사 CEO로 유럽의 금융거물 집안과 결혼한 린 로스차일드는 2014년 '포용적 자본주의'라는 포럼을 만들었다. 영국 찰스 황태자부터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스티브 슈워츠먼, IMF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 등 유명인사들을 참여시켰다. 주주뿐 아니라 이해관계자에 기반한 기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10년 전만 해도 '포용적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모순이 있다며 비난 받았을 터였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관리자산만 30조달러가 넘는 초대형 회계법인 '언스트앤영'까지 끌어들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라며 "만약 우리가 포용적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더욱 나쁜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월가의 한 경영자도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경영자들은 대중들이 쇠스랑을 들고 혁명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립튼은 "불평등, 기후변화 등의 존재론적 위협을 무시하게 되면, 기업 경영자뿐 아니라 월가 자산매니저, 기관투자가, 모든 주주들은 정치나 사회 등 외부에서 강제하는 규제입법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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