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직무급' 임금체계 확산 나서

2020-01-14 11:55:19 게재

저성장·고령화로 기업 지급능력 저하 … 노동계 "일방적인 개편 강요"

정부가 근속년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에서 탈피해 직무·능력 중심의 임금체계를 공공에 이어 민간으로 확산에 나섰다.

기본급은 작고 각종 수당이 많은 복잡한 우리나라 임금구조를 개선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의 시작이라는 긍정평가에서 사용자측의 일방적 주도로 임금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부정평가도 존재한다.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1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에서 '직무·능력 중심의 임금체계 확산 지원방향'을 발표했다.

고용부는 올해 '직무 중심 인사관리체계 도입 지원사업'을 신설해 직무관리체계 도입을 희망하는 기업에 전문 컨설팅을 지원한다. 직무평가도구가 개발된 보건의료·호텔·철강·금융·공공ㆍ사회복지서비스·정보기술(IT)·제약 등 8개 업종 가운데 업종마다 2개씩 16곳에 전문 컨설팅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예산 4억원을 편성했다.

고용부는 기업의 임금체계 개편을 지원하기 위한 안내책자 '직무 중심 인사관리 따라잡기'도 발간했다. 이 메뉴얼에는 기존 복잡한 임금구성체계를 단순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유형의 임금체계 개편 방법·사례 △직무가치에 기반한 인사관리체계(직무관리체계) 도입을 위한 직무분석·평가 방법 △새로 개발한 제조업 범용 직무평가도구 활용방법 등이 포함됐다. 책자는 실무자용 상세본과 관리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요약본으로 나눠 보급된다.

임금체계 개편은 기존 호봉제을 기본으로 하면서 연공성을 완화하거나 직무특성에 따라 임금에 차등을 두는 직무급과 업무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직능급(숙련급), 역할의 가치에 따른 역할급 등으로 바꾸는 것이다.

직무급은 임금의 주된 부분이 직무의 난이도, 업무강도, 책임의 정도, 기술 수준 등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임 차관은 "호봉제는 과도한 연공성으로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말했다.

호봉제가 과거 고도성장기에 노동자들의 기업 소속감을 높이고 숙련 노동자를 배출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고 기업도 함께 성장하며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이 연 3% 미만인 저성장이 지속되고 인구구조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기업의 부담을 증가시켜 청년들의 신규 채용 여력을 감소시키거나 중·고령자의 조기퇴직을 유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호봉급 임금체계를 운영하는 사업체(100인 이상)는 조속적으로 감소 추세이지만 여전히 58.7%로 절반이 넘는다.

연공성에 따른 임금격차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의 '임금 연공성 국제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년 미만 대비 30년 이상 근속자의 임금이 약 3.3배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유럽연합(EU) 15개국 평균의 약 2배에 이른다.

2018년 6월 기준 고용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300인 이상·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100%로 했을때 300인 이상 비정규직 사업장은 63.2% 수준의 임금을, 300인 미만 정규직 사업장은 56.8%, 300인 미만 비정규직 사업장은 41.8% 수준이다.

임 차관은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호봉 때문에 임금격차가 크거나, 서로 다른 일을 하는데 호봉이 같다는 이유로 비슷한 임금을 받는 등 '동일노동 동일임금' 취지에 반하거나 임금의 공정성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공공부문에서 직무급을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코트라는 1000명 이상 공공기관 중 처음으로 직무급제를 도입키로 했다. 통상·전문직 일반 직원의 경우 40단계에 이르던 호봉제 대신 직원 업무를 일의 난이도, 중요성, 책임범위 등을 토대로 16등급으로 분류했다. 역할 등급에 따라 성과연봉 차등 폭을 1.1∼1.3배로 조정하고 높은 역할 등급일수록 성과급 차등을 늘렸다.

코트라는 지난해 하반기 보수체계 합리화를 위한 외부 컨설팅을 진행했으며 5차례의 직종별 공청회와 직원투표를 거쳤다.

코트라 관계자는 "직원 79%가 직무급제 도입에 찬성했다"며 "하는 일에 따라 평가를 받으니 자신의 직무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직원도 적지 않다. 노조원 659명 중 투표 참여한 인원이 398명(60%)에 그친데다 투표인원 중 21%는 반대했다.

코트라 또다른 관계자는 "처음 시행하는 제도다보니 부담을 느끼는 직원도 많다"며 "현재 어떤 보직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 당장 올해 연봉이 차이날 수밖에 없는 점도 부정적인 이유"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민간기업에서도 직무급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하는 사업장이 늘고 있다.

삼양사는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연공급 호봉제를 성과연봉제로 변화를 주기 시작해 2002년 직무중심의 인사관리를 기본으로 하는 직급체계로 전환했다. 직무평가를 통해 경영자·팀장·팀원은 직무를 중심으로, 연구직·생산직은 역량을 중심으로 개편했다. 보상체계 역시 기존 연봉과 각종 수당이 혼재돼 있던 것을 기본연봉으로 통합하고 성과목표 당성 정도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평가는 업적평가와 역량평가로 이뤄진다.

삼양사의 직무중심 인사관리체계는 직원들의 성과에 대한 동기부여를 높이고 성과 등 합리적 사유에 따른 임금인상, 직무 승진 등을 통해 인력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다. 삼양사가 직무중심 인사관리체계 도입에 성공한 것은 노사간의 신뢰와 합의 그리고 합리적 운영을 우한 노사의 지속적인 개선과 보완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부가 호봉제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을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박근혜정부는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가이드북'을 내놨다. 가이드북은 노조가 임금체계 개편에 반대할 경우 노조의 동의 없이도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혀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샀다.

노사 간의 충분한 대화와 준비, 노사정간의 공감대가 필요한 지점이다.

임 차관은 "기업의 임금체계는 정부나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당사자 간 협의와 소통을 통해 노동자들이 수용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며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를 통해 바람직한 임금체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노·사 모두가 윈윈(win-win) 할 수 있는 사례를 확산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일방적인 임금체계 개편을 강요'라며 발발하고 있다.

만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최저임금으로 묶어두고 이제는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도 깎기 위한 임금체계 개악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며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로 판단하면 노·사 소통보다는 정부 가이드라인'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는 임금체계개선을 위한 노·정 협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도 "지원안에는 임금체계 개편에 앞서 대등한 노사관계와 노동자 대표제도의 미비함에 대한 개선책도 담기지 않았다"며 "임금체계 개편은 노사정이 논의를 통해 해결해야하는 부분인데 이번 발표는 사전 협의도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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