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설계부터 다시하자

"성공 보장된 저난이도 연구과제에 집중"

2020-02-13 11:31:00 게재

최첨단·도전적 주제는 뒷전 … 정부지원 과제수만 6만개, 관리 불가능

정부 연구개발(R&D) 사업은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인해 코리안 패러독스(역설)라고 비판받는다. 막대한 연구비를 투입하고도 그만한 성과를 못 내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정부는 R&D 과제 성공률이 98%에 이른다고 밝힌다. 정부 얘기대로라면 양과 질 측면에서 명실상부한 과학기술·산업기술 강국이다.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정부는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24조2200억원 책정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 산업기술진흥원 제공


◆R&D 예산으로 운영비 충당 = 이덕근 한국기술거래사회 부회장은 "우리나라 R&D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관리자 중심적"이라며 "과제기획을 할 때 고난도, 최첨단, 도전적 과제를 기획하기보다 결과가 어느 정도 자신하는 저난이도 과제를 선정하다보니 연구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경우 기관평가를 의식해 대형 장기연구보다 성과내기 수월한 단기과제를 주로 하는 풍조가 생겼다"면서 "중소형과제를 묶어 대형과제 수주 후 다시 쪼개 여러 과제를 수행함으로서 인건비 등 운영비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꼬집었다.

김유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도전적 연구에 따른 실패보호 장치와 사회 전반적으로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성과 데이터와 실패과정을 자산으로 축적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정책도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택과 집중보다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과제수도 R&D를 어렵게 만드는 구조다.

현직 경제부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 R&D 예산은 20조원 이상이고, 세부 지원과제 수는 6만개가 넘는다"면서 "이 많은 과제를 누가, 무슨 수로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그러다보니 성공이 보장되고 관리하기 수월한 과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다. R&D사업이 사고를 줄이고, 부정을 예방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현재의 R&D 체계가 십수년간 이어져오다보니 어느 한 부분 손댄다고 쉽게 개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 R&D 세부 지원과제 수는 2011년 4만1619개에서 2014년 5만3493개, 2017년 6만1280개로 급증했다.


◆국제 R&D협력 활성화 필요 = 산업기술진흥원(KIAT)이 펴낸 '2019 산업기술 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산업별 연구비 비중은 제조업이 61조1572억원으로, 서비스업 6조2349억원의 10배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연구개발 비 비중(9.1%)은 영국 56.6%, 프랑스 46.7%, 미국 31.9%, 독일 14.3%, 일본 11.8%보다 낮다.

1차 산업혁명 증기기관 시대에서 시작돼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 6시그마 시절에 적합했던 제조업 위주 R&D가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주류인 셈이다.

곽노성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특임교수는 "4차산업혁명은 서비스 시대라고 한다"며 "우리는 제조업에 치우쳐 서비스 산업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서비스 산업 비중을 늘리려는 정책 방향은 맞지만 문제는 현실성"이라며 "서비스 산업이 커지려면 사회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식의 가치,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서비스 산업 육성은 요원하다"고 말했다.

폐쇄적인 R&D구조에 대한 개선 목소리도 높다. 외국인 연구인력은 태부족하고, 외국과 공동 R&D도 미흡하다. 기업은 나홀로 R&D에 익숙하다.

장필성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R&D 기회의 탐색, 수행과정의 협력, 연구성과의 확산 측면에서 국제협력은 중요하다"면서 "국제협력의 양과 질을 모두 증대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차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기존 비즈니스모델이나, 산업영역이 붕괴되고 있다"면서 "중소기업은 이런 변화에 취약하고, 자체 기술개발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선제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대기업과 중견기업과의 협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공정성이냐 전문성이냐" 사회적 합의 필요 = 평가방식을 둘러싼 논란도 끊이질 않는다.

정부 R&D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교수는 "과제별로 다르지만 보통 7명 정도의 평가위원이 과제를 선정한다. 그런데 평가위원들은 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러다보니 공정성은 확보되는데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여기에 (평가위원 사전 노출을 우려해)심사 자료를 당일에야 제공받는다. 전문성이 부족하지만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파악할 여건이 안된다"며 "'전문성이냐 공정성이냐' 딜레마다. 진지한 공론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연구개발의 창의성과 미래비전은 고려하지 않고 수행 경험이 많은 기관이 선정되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이나 심사위원의 경우 자칫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경제부처 한 공무원은 "한 프로젝트에 두 개 업체가 응모했었는데, 두 곳 모두 준비가 부족했다. 회사별로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후 탈락한 업체가 감사기관에 편파심사를 했다고 투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조사를 통해 음해였음이 밝혀졌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될 고충을 겪었다"면서 "공직자들 사이에선 이런 점을 우려해 아예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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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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