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 소련·중국·북한 대신 '동맹' 나토·한국 탈탈 털었다

2020-02-13 11:19:15 게재

'워싱턴포스트'가 전한 CIA와 BND의 추악한 비밀작전

스위스 암호장비 업체 '크립토AG'의 창업자 보리스 하겔린은 사업가이자 발명가였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1940년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그는 'M-209'로 불리는 암호기기를 미국으로 갖고 갔다. M-209는 나치가 쓰던 암호기기 '에니그마'처럼 정교하고 확실한 보안성이 없었다. 하지만 하겔린의 기기는 휴대할 수 있고, 손으로 돌려 전력을 얻었기에 군대 이동중에도 사용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는 미군의 필요와 딱 떨어지는 장점이었다. 미군은 대강의 암호를 만들지라도 간편한 기기가 필요했다.

M-209로 보안 메시지를 보내는 건 따분한 일이었다. 철자 하나마다 다이얼을 돌린 뒤 기기 오른쪽에 달린 크랭크를 힘줘 잡아내려야 했다. 그러면 숨은 기어가 튀어 나와 암호화된 문자를 종이조각에 새겼다. 통신장교는 변환된 메시지를 모스 부호로 보냈다.

보안이 너무 약했다. 모든 적들이 해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암호를 푸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암호는 보통 군대 이동과 관련해 전술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쓰였다. 따라서 나치가 암호를 해독할 때면 정보가치는 이미 사라질 터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4만대의 M-209가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에 있는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위해 미 육군은 크립토사와 860만달러 계약을 맺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하겔린은 스웨덴으로 돌아와 공장을 재가동했다. 그는 미국에서 큰돈을 벌었다. 때문에 일평생 미국에 대해 충성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렇다 해도 미국 정보기관은 하겔린의 전후 움직임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 그는 더 진전된 암호기기 'CX-52'를 만들었다. 보다 불규칙적인 기계적 배열로 미국의 암호해독가들을 당황케 했다. 새로운 암호기기에 놀란 미국은 이를 '하겔린 골칫거리'(Hagelin problem)라 칭하며 집중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이 시기는 미국의 암호 해독술에 있어 '암흑기'였다. 소련과 중국, 북한은 이미 미국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 제조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미국 첩보기관들은 만약 다른 나라들도 하겔린의 새로운 암호기기를 사들이게 되면 전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미국은 하겔린을 움직일 몇 가지 지렛대를 갖고 있었다. △미국 주도 이념에 대한 하겔린의 호의 △미국이 여전히 자신의 암호기기에 대한 대량 구매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 △2차 대전에서 사용하지 않은 여분의 M-209를 시장에 풀어 크립토사의 이익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등이었다.

미국은 또 보다 중요한 인적자산을 갖고 있었다. 미군 암호해독 기관인 비밀정보국(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에서 일하던 암호학자 윌리엄 프리드먼이었다. 미국 암호학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로, 1930년대부터 하겔린과 친분을 쌓았다. 프리드먼과 하겔린은 배경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평생의 친구였다. 둘 다 당시 소련에 두고 나온 유산이 있었고, 암호의 정교화에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 120개국의 비밀통신을 가로챈 암호기기를 생산한 크립토사의 스위스 본사 건물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하겔린과 프리드먼은 1951년 미 워싱턴의 코스모스클럽에서 저녁식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하겔린과 미국 정보기관은 첫 번째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른바 '루비콘 작전'의 탄생이다.

회사를 스위스로 옮긴 하겔린은 비밀협약에 따라 가장 정교한 암호기기 모델을 미국이 승인한 나라에만 팔 수 있었다. 미국이 승인하지 않은 나라는 보안이 취약한 구형 모델만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하겔린은 선불 70만달러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하겔린과 미국 정보기관의 은밀한 관계는 지속됐다.

1960년 CIA와 하겔린은 라이선스 협약을 맺었다. 기존 약속을 재확인하면서 하겔린은 85만5000달러를 받았다. 또 매년 7만달러를 상담료 명목으로, 크립토사가 전 세계 다른 나라들과 계약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만달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보기관 영역의 전문용어로 고전적 의미의 '거부작전'(denial operation)이었다. 전술적이거나 전략적인 가치를 갖는 무기 또는 기술을 적이 점령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실시하는 작전이다. 하지만 이는 크립토사와 미국 정보기관의 협력 중 초반부에 불과했다. 이 비밀협약은 곧 독일 연방정보부(BND)가 참여하는 방향으로 확대됐다.

용감한 새 시대

미국 측은 애초부터 하겔린에게 암호기기를 조작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그런 구상에 반대했다. 하겔린 입장에선 지나친 처사로 여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CIA와 미 국가안보국(NSA)은 1960년대 중반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전기회로기판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하겔린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수동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암호기기를 고수하다간 멸종할 수 있었다.

NSA 암호연구자들도 통합회로기판의 잠재적 충격에 대해 걱정했다. 절대 해독할 수 없는 암호기기의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NSA 선임 연구자였던 피터 젱크스는 전기회로기판의 잠재적 약점을 찾아냈다.

그는 "만약 똑똑한 암호수학자가 공들여 디자인한다면, 회로기판 시스템은 끊임없이 무작위의 문자들을 생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실제 NSA 암호전문가나 초강력 컴퓨터의 관점에선 빈번히 반복되는 문구가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2년 뒤인 1967년 크립토사는 완전히 새로운 전자식 암호기기 'H-460'을 출시했다. 기기 내부 설계는 NSA가 담당했다.

CIA 내부보고서를 보면 이 관문을 넘어선 것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외국계 회사를 설득해 미국 뜻대로 암호기기를 쇠지렛대로 열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며 "용감한 새 시대를 열어제친 것"이라고 흡족해 했다.

NSA가 어설픈 '백도어'를 설치하거나 암호키를 토해내도록 비밀 프로그램을 심지는 않았다. 타국의 비밀통신을 가로채는 임무는 여전히 어려웠다. 공중신호를 가로챌지, 아니면 몇년을 더 기다려 광섬유케이블을 도청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크립토사 암호기기의 알고리즘을 조작해 해독 과정을 간소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여러달이 걸릴 수 있는 해독과정이 단 몇초로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크립토사는 늘 2가지 버전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우방에게 팔 수 있는 안심 모델, 그외 나머지 국가들에 파는 조작 모델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과 하겔린의 협력은 수동적인 '거부작전'에서 적극적 '선제조치'로 진화했다. 크립토사는 이제 제품 구매국을 제한적으로 선별하지 않았다. 구매자를 속이도록 고안된 기기를 더 적극적으로 팔기 위해 노력했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크립토사의 H-460 암호기기를 구매하는 외국 정부들은 구형 모델보다 훨씬 우수해 보이는 전자식 암호기기를 극찬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은 미국 정보기관에 자국의 비밀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다.

독일과 미국의 협력

1960년대 말 하겔린은 80세를 눈앞에 뒀다. 180명 이상을 고용할 정도로 성장한 크립토사의 미래에 불안감이 생겼다. CIA 역시 하겔린이 갑자기 회사를 팔거나 죽게 되면 기존 정보활동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했다.

하겔린은 한때 아들인 '보'(Bo)에게 회사를 물려주려 했다. 하지만 미국측은 그를 예측불가능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CIA는 아버지와 비밀리에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숨기려 했다. 아들 보는 1970년 워싱턴 순환도로에서 자동차 충돌사고로 사망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고의적 살인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은 크립토사를 아예 사들이는 방안을 수년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CIA와 NSA 간 의견 차로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프랑스와 서독, 기타 유럽의 정보기관들은 미국과 크립토사의 은밀한 관계를 전해 듣거나 또는 자체 판단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일부 기관은 이를 질투해 자신도 비슷한 거래를 할 수 있는지 여러 방법을 타진하기도 했다.

프랑스 정보기관이 1967년 하겔린에 접근해 서독 정보기관과 함께 크립토사를 사들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제안을 거절하고 이를 CIA측에 보고했다. 하지만 2년 뒤 서독은 미국측의 동의를 얻어 그에게 다시 접근했다.

1969년 초 워싱턴 주재 서독 대사관에서 미국과 서독 암호해독 담당부서가 크립토사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수개월 뒤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는 크립토사를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서독 수도 본에 사람을 파견해 1가지 조건을 내걸고 협상했다. '프랑스는 배제돼야 한다'는 것.

서독은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CIA와 BND 양국 첩보기관의 거래는 1970년 6월 이뤄졌다. 두 기관은 크립토사 매수 금액 575만달러를 공평히 분담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CIA는 사실상 서독측에 비용을 떠넘겼다. 거래 흔적을 남길 경우 향후 꼬투리가 잡힐 것을 우려했다.

유럽 중부 리히텐슈타인의 로펌이 크립토사 새로운 주인의 정체를 숨기는 걸 도왔다. 여러 개의 페이퍼컴퍼니와 무기명주를 활용해 회사와 관련한 법적문서에 관련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BND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로펌은 비밀 유지 명목으로 매년 일정액을 받았다.

크립토사를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이사진이 꾸려졌다. 그중 오직 1명만이 CIA와의 은밀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겔린이 일상의 경영을 맡겼던 스투레 니베르크였다. CIA 보고서엔 "BND와 CIA는 니베르크를 통해 크립토사의 활동을 통제했다"고 쓰여 있다. 그는 1976년 회사를 떠났다. 워싱턴포스트와 독일 공영방송 ZDF는 그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밝혔다.

미독 정보기관들은 크립토사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였다. 크립토사는 '미네르바'로 불렸고, 그 비밀작전은 1980년대의 경우 암호명 '시소러스'로 불려지다 이후 '루비콘'으로 변경됐다.

두 기관은 매년 크립토사가 벌어들이는 이익을 나눴다. BND가 회계를 맡아 CIA에 돌아갈 현금을 모처의 지하주차장으로 배달했다.

시작부터 두 기관의 협력엔 사소한 의견 불일치, 팽팽한 긴장관계 등이 있었다. CIA가 보기에 BND는 너무 이익을 내는 데 치중했다. CIA는 BND에 '우리가 하는 건 정보활동이지, 수익사업이 아니다'라고 계속 주지시켰다. 반면 BND는 미국이 동맹이나 적이나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나라를 염탐하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스페인이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등도 도청했다.

두 기관은 하이테크 기업을 운영하는 능력이 모자라다는 점을 절감했다. 기업 운영과 관련해 외부기관을 영입하기로 했다. 독일은 뮌헨 소재 대기업인 지멘스를 추천했다. 크립토사 이익 5%를 주는 대가로 영업과 기술적인 문제를 자문하는 역할이었다. 미국은 나중에 모토로라를 데려왔다. 고장난 기기를 고쳐줘야 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이 맺은 정보협약이다. 하지만 CIA와 크립토사 파트너십을 체결하면서 미국의 첩보 영역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전 세계 최고 수준 정보기관 2곳의 비밀스런 지원은 물론 전 세계 최대 기업 2곳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립토사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크립토사 매출은 1970년 1500만스위스프랑에서 1975년 5100만스위스프랑(약 1900만달러)으로 껑충 뛰었다. 거느린 직원만 250명이 넘었다.

CIA는 보고서에서 "미네르바(크립토사)를 사들인 건 노다지(bonanza)를 캔 것과 같았다"고 적었다. 외국 정부의 통신을 가로챈 활동 기간만 어느덧 20년이나 됐다.

이란의 의심

NSA의 주요 도청 타깃은 3개의 큰 범주로 구분됐다. 각각은 알파벳으로 암호화됐다. A는 소련, B는 아시아, G는 그외 모든 지역이었다. 1980년대 초 G그룹에서 수집된 첩보의 절반 이상이 크립토사 암호기기 덕분이었다.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미국의 정상이 캠프데이비드에 보여 평화협정을 논의했다. NSA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본국 카이로에 보내는 전문을 몰래 가로챘다.

1년 뒤 이란 무장단체가 미 대사관에 들어가 52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삼았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알제르를 우회한 비밀채널 통신을 통해 인질 협상을 벌였다. 당시 NSA 국장이었던 인먼은 "카터 대통령이 정기적으로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부가 최근 미국의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물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당시 대통령의 질문에 약 85% 비율로 대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알제리와 이란이 크립토사의 암호기기를 사용한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작전은 공직에 있을 때 맞닥뜨렸던 것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토로했다.

NSA는 리비아 통신을 도청하다가 카터 대통령의 동생인 빌리 카터가 워싱턴 정가에서 리비아의 이해관계를 도모하는 대가로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법무부에 보고했고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들어갔다. 동생 카터는 리비아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뺌했다. 그는 기소되진 않았다. 대신 외국 로비스트로 등록하고 활동해야 했다.

1980년대 크립토사의 고객 명단은 마치 글로벌 분쟁지역 카탈로그를 연상케 했다.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는 크립토사 최대 고객이었다. 이란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이라크 리비아 요르단 한국이 그 뒤를 이었다.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크립토사와 미독 정보기관들은 경쟁사에 대한 비방전을 전개했다. 크립토사는 또 대표에게 롤렉스 시계 10점을 들려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보냈다. 뇌물전략을 구사한 것. 또 스위스에 사우디인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가자들이 여흥으로 사창가를 방문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크립토사 직원들은 인센티브를 받으려는 욕심에 복잡한 암호기기를 사용할 준비가 안된 나라에 대량으로 팔기도 했다. 나이지리아는 크립토사 기기를 대량 구매했지만, 미국과 서독 정보기관은 2년이 지나도 정보가치가 있는 첩보를 생산하지 못했다. 크립토사가 이유를 알기 위해 직원을 보내 보니 포장도 안 뜯긴 암호기기가 창고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2년 크립토사 암호기기를 사용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정보를 가로채 그 나라와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던 영국에 넘기기도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크립토 활동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리비아는 1986년 서독 주둔 미군이 자주 애용하는 서베를린 나이트클럽에 폭탄을 투하하는 사건에 연루됐다. 미군 2명, 터키 여성 1명이 사망했다.

레이건은 열흘 뒤 리비아 보복타격을 지시했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미군 공습의 희생자 중 카다피의 딸이 포함돼 있었다. 레이건은 리비아에 대한 공습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미국은 리비아가 직접 연루됐다는 중거를 갖고 있다. 그 증거는 정확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그 증거는 주베를린 리비아 대사관이 나이트클럽 폭탄테러 발생 1주일 전 '공격을 감행하라'는 본국의 지령을 받은 것, 그리고 테러 하루 뒤 대사관이 본국에 '임무에 성공했다'는 전문을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레이건의 언급은 리비아와 베를린 주재 자국 대사관의 통신 전문을 가로채 해독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도청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리비아뿐만이 아니었다.

리비아가 크립토사 암호기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란은 점차 크립토사 장비의 보안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6년이 지나도록 해당 장비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체불가능한 인물

CIA와 BND가 크립토사를 인수한 뒤 비밀도청을 수행하면서 가장 신경쓴 지점는 크립토사의 직원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다.

두 나라 정보기관들은 하겔린이 직원들에게 베푼 금전적 혜택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 직원 보수는 매우 높았고, 본사 근처 호수에서 소형 범선을 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렇다 해도 암호화 설계와 밀접한 일을 하는 직원들은 점차 CIA와 BND의 비밀활동 핵심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제품을 개발하는 엔지니어와 설계자들은 종종 의문스러운 외부 기관이 전적으로 담당하는 알고리즘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크립토사 경영진은 해당 직원들에게 '알고리즘 설계는 지멘스와의 컨설팅 협약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속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암호화 관련 결함이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왜 크립토사 엔지니어들은 자사 제품의 결함을 고칠 수 없는지 등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CIA와 BND의 진짜 역할을 알고 있던 크립토사 CEO 하인츠 바그너는 1977년 다루기 힘든 한 직원을 갑자기 해고했다. NSA가 '시리아에서 나오는 외교 통신문을 갑자기 해독할 수 없게 됐다'고 불만을 제기한 직후였다. 해당 엔지니어인 페터 프루티거는 오래 전부터 크립토사가 독일 정보기관과 공모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시리아가 크립토 암호기기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자 여러 차례 수도 다마스쿠스를 방문해 본사의 승인 없이 결함을 고쳐줬다.

CIA 보고서엔 "프루티거는 미네르바(크립토사)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상황은 안심하지 못하게 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CIA는 바그너 대표가 프루티거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해 입을 막기보다 갑작스레 해고하면서 상황을 위험하게 만든 데 격분했다.

미국 측은 바그너가 1978년 유능한 전기엔지니어 멘지아 카플리쉬를 영입한 데 더욱 놀랐다. 그는 조국 스위스에 돌아와 크립토사에 입사지원서를 넣기 전 메릴랜드대 전파천문학 연구자로 수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바그너는 카플리쉬를 고용할 기회를 덥썩 잡았다. 하지만 NSA는 즉각 우려를 표했다. "너무 똑똑한 인물이기에 비밀을 들킬 우려가 크다"는 것이었다.

NSA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카플리쉬는 곧 크립토사 암호기기의 약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발팀 동료 슈푀른들리와 함께 모토로라의 기술을 사용하는 HC-570 등의 암호기기를 대상으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벌였다. 슈푀른들리는 지난달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기기 내부 작동과정, 각 단계에서 의존도를 들여다봤다"며 "그 결과 원문과 암호화된 메시지를 단 100개 철자만 비교해도 해독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토록 낮은 수준의 보안이라는 점에 놀랐다. 알고리즘 자체가 의심스러워 보였다"고 말했다.

카플리쉬는 이후 수년 동안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강력한 알고리즘을 설계했다. NSA 측에서는 비밀통신을 해독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가 만든 알고리즘을 사용해 50대의 HC-740 암호기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크립토사 경영진이 이 사실을 알고 즉각 개발을 중단시켰다.

카플리쉬는 지난달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 노력은 환영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립토사는 이전의 조작된 알고리즘을 복구해 나머지 제품을 만들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50대의 암호기기는 외국 정부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시중은행들에 판매했다. 이같은 돌발적 상황전개를 은폐하기가 어려워진 바그너 대표는 한때 연구개발팀 특정 사람들에게 "크립토사는 원하는 대로 할 자유가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CEO의 그같은 고백은 엔지니어들을 달래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이들은 바그너의 말을 '독일 정부가 크립토사의 기술에 제한을 걸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CIA와 BND는 그같은 수준의 비밀작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크립토사엔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직원이 여럿 있었다. 1970년대가 저물면서, 크립토사의 실제 주인인 미독 정보기관들은 보다 진보한, 그러면서 발각될 위험이 적은 알고리즘 결함을 고안해 낼 마법사를 찾기로 결정했다. 연구개발부서를 길들일 수 있을 정도로 암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리저리 알아보다 결국 스웨덴 정보기관이 제시한 인물로 낙점했다. 크립토사 창립자 하겔린은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스웨덴으로 피신한 바 있다. 덕분에 스웨덴은 CIA와 크립토사의 내밀한 관계를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14일(금요일자)에 이어집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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