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보건행정 개편할 때다│②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숙고

"혼란 최소화 위해 단계적 분리해야"

2020-08-13 11:35:09 게재

영국·미국 등 산업안전보건청으로 독립 … "고용부 내부조직 강화로는 제한적"

4월 29일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참사로 노동자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과징금, 징벌적 손해배상 등 처벌강화와 함께 산재예방을 위해 산업안전보건행정을 개편해야 한다는 요구도 높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모델이 영국의 '법인과실치사법'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배울 것은 처벌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행정조직이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산재사망발생률을 보이는 것은 강한 처벌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전문적인 산재예방행정조직을 갖췄기 때문이다. 주요선진국의 산업안전보건행정 사례와 고용노동부 외청 조직인 '산업안전보건청' 설립방안에 대한 노사,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살펴본다.

고용부로부터 독립된 외청 조직인 '산업안전보건청' 설립논의는 10여 전부터 있었다. 2005년 고용부는 산업안전보건법령 및 정부조직 체계 등을 고려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2012년 노사정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에서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의 합리화 방안 연구'를 통해 개편 필요성이 제기됐다.

2018년 7월 고용부 장관 자문기구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산업안전보건청 설치를 권고했다. 올해 4월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의제별위원회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이 포함된 '산업안전보건 행정체계 개편안'에 대한 합의안도 나왔다.

지난달 22일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산업안전보건청을 설립하자는 정부조직 개정안을 대표발의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입법조사처도 거들었다. 입법조사처는 10일 '2020 국정감사 이슈분석' 보고서를 통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10만명당 사고사망률은 한국 9.6명(2011년), 일본 2.0명(2009년), 미국 3.5명(2009년), 독일 1.6명(2009년)이다. 산업재해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손실은 2011년 기준으로 18조1200억원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해 교통재해의 1.4배, 자연재해의 15배 수준에 이른다.

입법조사처는 "산업안전보건 담당 근로감독관은 300명 수준에 불과해 예방적 차원의 효과적인 감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재해발생 후 조치라는 소극적 감독체계에서 벗어나 기본적 책임으로서 산업안전보건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문화·고도화·복잡화돼 가는 산업안전보건환경에 적극적·효과적 대응을 위해 산업안전보건청을 신설하는 경우 전문성·행정력 강화를 위한 조직·인력·기능 개편방안이 연구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산업안전행정체계가 갖춰진 외국 사례도 참고할 것을 제안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영국이 강한 처벌을 사회적으로 수용된 것도 산업안전보건청(HSE)이라는 전문적인 산재예방행정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노동연금부 외청 조직으로 HSE를 설치했고 미국도 노동부 외청조직으로 산업안전보건청(OSHA)을 설치해 사업장의 안전보건업무 만을 독립적이고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HSE와 OSHA에는 보건안전감독관 외에 다양한 직무별 기술자, 과학·의학전문가 등이 배치돼 있다. HSE의 근로감독관은 안전보건 관련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를 중심으로 채용해 2년간의 교육훈련 뒤 정식으로 근로감독관으로 채용한다. 채용 뒤에 산업안전보건 업무에서 종사하면서 대학기관 등에서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직무교육을 받는다. OSHA의 안전보건감독관도 지속적으로 산업안전보건 전문교육기관(OTI)에서 다양하고 심층적·전문적인 직무교육을 받는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문제를 검토할 때는 불가피하게 산업안전보건행정조직의 외곽기구인 '산업안전보건공단'(공단)의 기능·인력조정을 전제해야 한다"면서 "이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고 연착륙을 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단기적인 방안으로 고용부의 산업안전보건 조직인 본부의 산재예방부서와 지방고용노동관서의 산재예방지도과를 고용부로부터 분리해 산업안전보건청으로 이전한다. 본부는 외청으로서 최소규모인 2개국 체제로 출발하고, 지방관서는 산업안전보건의 지역적 특성에 기초해 설치하고 산업안전과 산업보건 부서로 편제한다.

중기방안으로는 산업안전보건청 본부, 지방 모두 크게 감독부서와 지도·지원부서로 편제한다. 감독부서는 안전·보건부서로 구성하고, 지도·지원부서는 기계안전, 전기안전, 화공안전, 건설안전, 산업위생, 산업의학·간호 등으로 구성해 분야별 전문성을 골고루 갖춘 독자적인 전문행정체제를 갖춘다. 공단의 기술지원(지도) 등의 업무는 산업안전보건청으로 중·단기적으로 이관한다.

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조사·연구, 교육(강사양성교육, 안전보건감독관 전문화교육 등), 기법·자료 개발·보급, 평가 등 산업안전보건의 플랫폼(인프라)을 조성하는 업무를 중심으로 개편하는 방식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강문대 변호사(전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는 "산업안전보건업무와 명확한 구분이 어려운 정책적 업무를 독립 후 고용부와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산업안전업무는 근로기준 관리감독 업무와 중첩 부분이 있고 산재보험 업무와도 밀접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이 전문성 강화의 유일한 방도로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노동계는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의 강화 필요성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공단과의 역할분담등 관계설정을 제기했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은 "산업안전보건청이 설립되면 산재보상은 고용부에 남고 산재예방 업무는 산업안전보건청으로 이관되는데, 분리에 따른 유기적인 연계와 예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공단의 역할문제 역시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말했다.

공단노조는 산업안전보건청 설립보다는 공단의 산업안전보건 업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방안으로 △고용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을 실 또는 본부로 승격 △공단의 예방 사업 및 역할 제고 △공단에 산업재해 조사권, 행정권 부여 등을 통한 권한 강화 등을 제안했다.

현재 공단은 산재예방과 중대재해 조사업무를 하고 있다. 전국 27개 지역조직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교육원·인증원, 미래전문기술원 등 산재예방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정 교수는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을 강화하더라도 고용노동부 내부의 국 또는 실의 형태로 있는 한 효과는 제한적 일 것"이라며 "산업안전보건 업무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산업안전보건행정조직을 고용노동부와 독립적인 외청, 즉 산업안전보건청을 설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산업안전보건행정 개편할 때다" 연재기사]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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