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글 '재민체'로 태어나다

2020-10-08 11:39:38 게재

서울대 의학박물관 전시 … 박재갑 서울대 명예교수, 김 민 국민대 교수 개발

1908년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근대식 국립병원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 개원일에 '대한의원개원칙서(국가등록문화재 제449호)'를 내린다.
박재갑 서울대 명예교수가 재민체로 쓴 '대한의원개원칙서'. 사진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 제공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대한의원개원칙서에는 "짐이 생각하건대, 국운의 성쇠는 국민의 건강과 질병에 연유함이 많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을 살피건대, 위생사상이 아직 유치하고 의료기관이 갖춰져 있지 않아, (중략) 의술의 보급과 진흥을 도모하고자 대한의원을 창설하기로 했다. 담당 관리들이 업무를 충실히 행해 이제 공사가 준공되고 개원식을 거행해 본 원의 업무를 시작해 그 효과의 서광이 점차 원근에 미쳐 온 국민이 그 혜택을 입게 됨은 짐이 마음 속으로 만족하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다.

1908년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내린 '대한의원개원칙서'. 사진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 제공


칙서는 황제가 내릴 수 있는 글을 의미하기에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만이 내릴 수 있었다. 특히 대한의원개원칙서에는 순종 황제가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히 표현돼 있으며 한문 외에 한글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대한의원개원칙서에 쓰여 있는 한글이 574돌 한글날을 맞아 새로운 한글 글꼴 '재민체'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대 의학박물관은 8일 '재민체'를 발표하는 특별전 '함께 쓰고 함께 그리다-개원칙서에서 한글재민으로'를 열고 국립암센터 원장을 지낸 박재갑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가 재민체로 쓴 '대한의원개원칙서' 등 작품들을 공개했다. 재민체는 박재갑 교수와 김 민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팀이 함께 개발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박재갑 교수는 "서울대병원 시계탑 건물 현관을 지날 때마다 보게 되는 대한의원개원칙서의 글꼴이 단아하고 아름다워 여러 차례 붓글씨로 임모했다"면서 "김 교수팀과 함께 대한의원개원칙서에 등장한 총 33자 한국 자소를 기반으로 2350자 완성형 디지털 폰트 재민체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박재갑 교수와 김 교수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재민체 개발을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수많은 고문헌들을 조사했으며 대한제국 황제의 칙서 중 국한문 혼용체로 남아 있는 문서는 대한의원개원칙서가 유일하다고 밝혔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글로, 한글 역사의 절정에 기록된 칙서이기도 하다.

박재갑 교수와 김 교수팀은 재민체에 황제의 말씀이 담기는 문서에 적힌 글자의 위엄과 기품을 담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나아가 재민체 한글 2350자를 개발하는 것을 넘어 한자 4888자를 개발해 재민체를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 교수는 "재민체가 가볍고 나약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안에 굉장한 강건함을 담았다"면서 "한글 2350자를 모두 보면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윤정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황제의 말을 옮겨 쓰는 것이기 때문에 외유내강을 포함하고 있다"면서 "획이 날카롭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뼈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어 "궁체도 명조체도 아닌 접점의 서체이기 때문에 한자가 만들어진다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전시에는 1898년 정삼품 지석영 선생의 '학부대신께 올리는 글', 1750년 영조 시대에 역질을 주제로 한 글, 1799년 독감을 주제로 한 글을 박 교수가 재민체로 쓴 작품들이 함께 출품됐다. '학부대신께 올리는 글'은 한문으로 된 서신을 한글로 번역해 재민체로 쓴 것으로 서울대 의대의 전신이 설립되는 계기가 된 서신이다. 역질과 독감을 주제로 한 글에서는 코로나19 상황과 비슷하게 전국적으로 역질과 독감이 유행했던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는 8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리며 유튜브(https://youtu.be/5Bx3QaTh3cU)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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