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국회의원들의 입법권 남용

2020-11-02 11:20:24 게재
국정감사가 마무리되고 입법의 시간이 왔다. 2일 현재 상임위에 배정된 의안은 4636개다. 이중 의원이 낸 게 4382개다. 21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한지 5개월이 지났다.

의원들이 한 달에 874개, 하루에 29개씩의 의안을 제출한 셈이다. 의원 1인당 14개씩 의안을 냈다. 열흘에 1개를 만들어낸 셈이다. 20대 국회 같은 기간에 제출된 의안은 3090개였고 의원들이 제출한 게 2888개였다. 전체 발의 의안은 50.0%, 의원 발의 의안은 51.7% 늘었다.

'무더기 법안'들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계류 의안 4452개 중 행안위에 배정된 게 698개로 가장 많았고 복지위는 538개로 뒤를 이었다.

법안 심사 속도보다 발의 건수가 빠르게 늘면서 심사 적체가 불가피해 보인다. 20대 국회에서 발의한 법안 2만4141개 중 법안소위에 상정조차 하지 못한 채 폐기된 게 절반이 넘는 1만2418개였다.

19대에는 1만7822개 법안 중 소위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국회의원 임기와 함께 폐기된 게 30.2%인 5388개였다. 20대엔 19대에 비해 발의 법안은 35% 늘었지만 법안소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법안은 75%나 증가했다.

발의된 법안 규모가 국회의원들이 감당한 수 있는 심사가능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20대에서 상임위 전체회의는 연평균 20번(19.8회) 정도, 법안소위는 7번(6.8회) 정도 열렸다. 민주당이 21대 당론 1호로 제시한 '일하는 국회법'은 법안소위를 월 4회 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구 활동 등에 매달려야 하고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재보궐선거 등 주요 선거 활동에도 동참해야 하는 상황에서 '월 4회 회의'가 가능하겠느냐는 반론이 제기된다.

또 월 4회 심사만으로 쏟아지는 법안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법안심사에 앞서 충분한 분석, 의견수렴 등 심사 준비를 끝낼 수 있느냐는 의구심도 불식시키기 어렵다.

무더기 법안 발의가 '부실 심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과도한 발의가 심사 전체를 어렵게 만들면서 정작 중요한 법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게 하는 문제까지 번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20대땐 디지털성범죄 차단을 요구한 국민동의청원의 부실심사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외부에서 입법권 남용에 대한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국회의원과 정당들이 스스로 방울달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법조사처는 미리 입법 후를 진단해 보는 '사전영향평가제도'를 제안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지난 22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법안 발의 과잉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며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권리 제약이나 처벌 강화 등 규제가 양산된다는 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한 방안 마련을 국회미래연구원에 지시했다"고도 했다.

자정능력이 떨어지거나 기득권을 지키려 변화를 거부하면 외부 압력은 거세지고 변화는 더 과격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입법부 고유권한인 법안 발의권을 외부에서 강제로 차단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슷한 법안을 여러 의원들이 따로 내는 쪼개기 법안, 충분한 고려가 되지 않은 어설픈 법안 등은 의원이나 정당 자체적으로 걸러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21대 들어 5개월간 폐기·철회한 법안만 57건(폐기 23건, 철회 34건)이다. 대표발의 의원뿐 아니라 공동발의 의원들에 부실 입법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검찰, 언론, 국정원 등 기득권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칼자루를 든 입법부의 '자기 개혁'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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