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리오’ 유럽의 병자 이탈리아 구할까

2021-02-24 12:00:21 게재

슈피겔·이코노미스트지, 이탈리아 마리오 드라기 신임 총리의 과제 분석


지난 13일(현지시간)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이탈리아 총리로 등장했다. 2차대전 이후 75년 동안 68번째 수립된 내각을 이끌게 됐다. 그에게 총리를 맡아달라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오자마자 이탈리아 증시는 치솟았다. 총리 취임 후 투자자들이 이탈리아국채 경매에 몰려들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이는 2012년 7월의 한여름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당시 ECB 총재였던 드라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whatever it takes) 휘청거리는 유로존을 살려내겠다”고 장담했다. 그가 제시한 무제한 국채매입 프로그램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강렬한 그의 한마디는 결국 금융시장의 폭풍우를 잠재웠다.

EU에서 가장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

이탈리아는 최악의 경우 유럽을 붕괴시킬 만큼 리스크가 크다. 그리스나 포르투갈 역시 감당 못할 부채를 지고 있지만 최악의 상황에선 유럽의 동료 국가들이 구제할 수 있다. 프랑스나 스페인 독일도 절대적 기준에서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경제규모가 크고 나름 괜찮은 경제성장 덕분에 시장을 놀라게하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다. 오직 이탈리아만 3가지 취약점을 모두 갖고 있다. 부채의 절대적 크기와 상대적 크기 모두 거대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경제성장이 정체된 나라였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 내에서 기업하기 가장 힘든 국가 중 하나다. 과도한 관료중심주의가 극도로 느린 사법체계와 결합해 투자에 제동을 건다. 번영하는 북부지역과 유럽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지역 중 하나인 남부지역 간에 구조적 불균형이 깊다. 정부 보조금 정책도 그같은 골을 메우는 데 실패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이탈리아의 운명은 몇주 뒤에 결정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3월 말엔 1년 간 시행됐던 ‘노동자 해고금지 규정’이 만료된다. 노동조합들은 코로나 위기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일제히 노동자를 해고할 경우 사회적 폭탄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거기에다 4월말까지 ‘EU 경제회복기금’ 사용계획을 제출해 승인받아야 한다. 이 계획안을 놓고 지난 정부가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연정이 무너졌다. 그리고 올 여름까지 백신접종이 이뤄져야 한다. 가뜩이나 과로에 지친 이탈리아 보건의료 체계가 또 한번 벅찬 과제를 안게 됐다.

슈피겔은 현재 이탈리아의 위기를 3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오성운동’과 ‘동맹’이라는 두갈래의 포퓰리즘 공격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양당은 의회 다수당을 점한 데다 여전히 반체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둘째 이탈리아는 EU와 오랫동안 불화를 겪고 있다. EU 내 적절한 역할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셋째 경제침체 장기화로 고통받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타협 모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슈피겔은 “이런 상황 때문에 새로운 총리에 대해 정치권 전반에서 열광하고 있다. 사실 드라기 총리가 맡은 임무는 매우 벅차다. 힘들기만 하고 보상은 못받을 것이다. 그 임무를 떠안고자 하는 누구나 영웅으로 보일 정도”라고 전했다.

날카로운 정무감각 지닌 기술관료

이코노미스트지는 “드라기에겐 ‘기술관료’라는 이미지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엔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0년대 초 유로존 위기 때 날카로운 정무감각을 선보였다. 양적완화(QE)와 같은 급진적 정책 변화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유로존 내 매파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는 특히 자신을 비판하는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옌스 바이트만 총재를 몰아붙였다. 독일 보수파들은 그의 정책이 비둘기파적이라며 혐오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에 제동을 걸진 못했다. 2019년 드라기가 ECB 총재직을 떠날 때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유럽을 살린 인물’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그리고 민간인 최고의 영예인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드라기는 약 30년 전인 1991년 4월 12일 이탈리아 재무부 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골드만삭스에 잠시 몸을 담았다. 그러다 냉철한 경제위기 관리자로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와 ECB 총재다. 그를 잘 아는 한 은행가는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다.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ECB에서 ‘빅픽처 가이’(Big Picture Guy,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라는 명성을 얻었다. 2012년 여름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쿠데타는 ECB 누구와도 상의없이 드라기 혼자 생각해 낸 것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재무장관만 사전 연락을 받았다. 드라기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발언에 독일과 프랑스는 즉각 지지를 표했다. 시장의 패닉이 잦아들었다.

드라기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진다. 로마 교황청 학술원 때부터의 지인인 스테파노 자마그니는 “드라기의 인생경로 때문”이라며 “그는 15세 때 부모를 여의었다. 그리고 예수회학교 학생으로서 엄격한 양육 과정을 겪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라기에게 붙여진 신자유주의라는 딱지가 정확한 건 아니라며 “그는 매우 신실한 가톨릭교인이다. 사회적 의식이 큰 사람”이라고 평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드라기는 이탈리아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다. 국민의 창의성, 굳건한 산업 기반, 전세계에 알려진 유명기업들…. 하지만 그 자질들이 지속적인 정치적 혼란, 북부와 남부의 깊은 분열 등에 묻힌다고 보고 있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잠재력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다.

좌우동거 내각, 제보다 젯밥?

이탈리아는 구조적 개혁이라는 쓴 약을 삼켜야 한다. 쓰디쓴 약을 잘 삼키도록 돕는 설탕도 갖고 있다. 지난해 여름 EU가 합의한 경제회복기금이다. 이탈리아는 향후 6년 동안 보조금과 대출 등의 명목으로 EU로부터 약 2000억유로를 받아 쓸 수 있다. 물론 엄정한 조건이 따른다. 대부분은 녹색프로젝트나 디지털 전환 사업에 쓰여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에 경제가 망가진 이탈리아는 현재 예상대로라면 2023년이 돼서야 코로나 이전 수준의 GDP를 되찾게 된다. 이탈리아 우니크레디트 이코노미스트인 마르코 발리는 “우리 모두는 개혁 우선순위를 알고 있다. 문제는 절실히 요구되는 개혁을 드라기가 빠르게 성취할 수 있느냐 여부”라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지난 10년간 6명의 총리를 교체했다. 드라기와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또 다른 비정치인 출신 총리가 있었다. EU 반독점위원회 집행위원 마리오 몬티다. 그는 2011년 이탈리아 국채금리가 치솟으면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실각하자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고작 18개월 재임했다. 그가 제시한 연금개혁안은 이후 지지부진해졌다.

드라기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다. 그의 유산인 ECB 채권매입 프로그램은 후임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가 이어받았다. 드라기가 까다로운 개혁을 추진하면서 시장을 계속 잠재워야 할 때, ECB의 적극적 채권매입 프로그램은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다. 국내 유권자들의 동요도 이전보다는 덜할 수 있다. 드라기는 높은 지지를 받으며 취임했다. 몬티 총리는 재정지출을 삭감하라는 EU의 냉혹한 요구에 부응하느라 인기가 없었지만 드라기정부는 2000억유로 의 경제회복기금을 쓸 여력이 있다.

드라기 내각엔 좌우 중도가 골고루 포진해 있다. 극우 ‘동맹’ 대표 마테오 살비니는 EU를 비판하던 기존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고 내각에 참여키로 했다. 유로존을 구했던 영웅, 드라기 총리의 흡인력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사실은 이탈리아에 할당된 경제회복기금에 눈독을 들이기 때문”이라며 “드라기 총리가 기금을 어떻게 나눌지에 따라 향후 좌우동거 내각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드라기 총리는 지난주 의회에서 “단결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부르짖었다. 오성운동 의원 1/4은 첫번째 상원 신임투표에서 드라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관 임명과 스키슬로프 폐쇄와 관련해 벌써 파열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갈등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는 게 문제다.

ECB에서 일했고 지금은 런던경영대학원 교수인 루크레치아 라이힐린은 드라기 총리를 잘 안다. 라이힐린은 드라기정부 재무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드라기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경고하고 나섰다. 그는 슈피겔에 “드라기정부에게 장기간의 시간표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수년 동안 논의돼온 근본적인 개혁안을 신속히 실행할 여유가 많지 않다. 이탈리아 정치는 너무 분열됐다”고 말했다.

드라기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이코노미스트지는 “슈퍼마리오가 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도 해낼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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