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날 쏘세요" 목숨 건 호소

2021-03-03 11:33:20 게재

미얀마 수녀 무장경찰에 무릎꿇고 애원 … 경찰, 시위대에 또 발포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한 미얀마 군경의 무장진압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가운데 목숨을 걸고 무장경찰 앞에 무릎 꿇고 호소하는 한 수녀의 모습이 공개돼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미얀마 주교회 의장이자 양곤 대교구 대주교인 찰스 마웅 보 추기경은 지난달 28일(이하 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미얀마 현지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 가운데 한 수녀가 중무장한 경찰 병력을 앞에 두고 도로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습도 포착됐다.

누 따웅 수녀가 미얀마 무장경찰들 앞에서 무릎꿇고 애원하고 있는 모습. 사진 마웅 보 추기경 트위터


시위대에 폭력을 쓰지 말아달라며 애원하는 표정과 두 손을 든 채 울부짖는 모습도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미얀마 북부 도시 미치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원 소속 안 누 따웅 수녀라고 한다.

보 추기경은 사진과 함께 올린 글에서 "누 따웅 수녀가 자유와 인권을 달라고 항의하는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고 썼다.

사진이 공개된 지난달 28일은 미얀마 군경의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으로 시위자 가운데 최소 18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다치는 등 최악의 유혈사태가 일어나 '피의 일요일'로 불린다.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누 따웅 수녀의 모습. 사진 마웅 보 추기경 트위터


당일 누 따웅 수녀가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를 목격한 누 따웅 수녀가 거리로 나선 것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홀로 경찰병력과 맞선 수녀의 모습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의 비극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날 보 추기경이 공개한 사진들은 이탈리아 유수의 가톨릭 전문 매체들에 잇달아 실리며 전 세계 교인들에게 전해졌다.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는 1일자 기사를 통해 당시 누 따웅 수녀가 현장에서 "쏘지 마세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마세요. 원하시면 나를 쏘세요"라고 외쳤다고 한다. 수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들도 행진을 멈추고 총을 내려놨다고 한다. 누 따웅 수녀는 또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에 수녀원을 피신처로 제공하는 한편 부상자들의 응급 치료에도 도움을 줬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수녀님에 의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인사는 "수녀님의 진심어린 요청으로 군인들의 폭력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달려갔다"며 목격담을 전했다.

하지만 미얀마 군경의 폭압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미얀마 경찰은 2일 시위대를 향해 또다시 실탄을 발사해 최소 3명이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의 일요일' 이후 이틀 만이다. 특히 이날은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 회의가 열렸지만, 미얀마 군정은 실탄발사를 통해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현지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이날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과 제2 도시 만달레이 등 다수 지역에서 대규모 쿠데타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맞선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 고무탄으로 강경 진압해 부상자가 속출했고, 시위대 다수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특히 북서부 깔레이 타운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 3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AFP통신이 의료진 등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한 구조대원은 "깔레이에서 군경의 진압으로 20명 가량이 부상했고, 실탄을 맞은 3명은 위독하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부상자를 치료한 한 의사는 "한 명은 허벅지, 다른 한 명은 복부에 (총탄을) 맞았고 또 다른 한 명은 가슴에 맞았는데 그의 상태가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로이터 통신은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해 깔레이 타운에서 4명이 경찰의 실탄에 맞아 부상했고, 다수가 고무탄으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양곤 시내 아웅산 장군길에서도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실탄과 고무탄, 섬광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양곤에서는 경찰이 실탄을 시위대를 향해 발사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한편 이날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화상으로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 회의에서는 미얀마 군부가 구금 중인 아웅산 수치 고문의 석방과 민주주의 회복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나왔다. 운나 마웅 르윈 미얀마 군정 외교장관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이 내정 불간섭 원칙을 깨고 수치 고문의 즉각 석방을 촉구했다. 특히 테오도로 록신 필리핀 외교장관은 수치 고문의 즉각 석방과 쿠데타 이전 상태로의 완전한 복귀를 촉구했고, 레트노 마르수디 인도네시아 외교장관도 민주주의 회복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다.

정재철 기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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