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진실을 찾아 ①│알타밀약의 진실

맥아더, 1945년 5월 '한반도 이남지역만 점령'계획 세워

2021-09-02 00:00:01 게재

38선 분할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관점은 미군장교가 급조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으로 진입하자, 8월 10일 30분이란 짧은 시간동안 본스틸과 러스크란 두 미군대령이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38선을 구상했고, 이를 소련에 제안해 동의 받았다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38선을 즉흥적으로 그었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권영근 박사는 '한반도와 강대국의 국제정치-미국의 한반도정책을 중심으로(1943~1954)'란 책에서 "(미군장교 급조설은) 미국이 한반도에 항구적인 분할 점령을 주도했음을 은폐하기 위한 성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은 일본군 무장해제가 아니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 차원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미소의 38선 분할 점령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합의됐다는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회담 당시 스탈린 소련 공산당서기장(왼쪽)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대화 장면 출처 : 루즈벨트 기념도서관


◆이승만 "미국이 두 번 한국을 버렸다" =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분할 점령을 미국과 소련이 합의했다는 얄타밀약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은 얄타회담 약 3개월 후인 1945년 5월 15일, 미국내 한국위원회 위원장(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자격으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한국과 관련해 카이로선언에 반하는 얄타 비밀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짐에 따라 각하께서도 저 만큼이나 놀라셨을 것"이라며 "각하께서는 한국이 비밀외교의 희생물이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첫 번째 비밀협정(카쓰라-테프트밀약)은 20년간 비밀에 붙여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얄타협정은 연합국 회의 중 바로 이곳에서 폭로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6월 5일 국무부장관 대리를 대신해 프랭크 록하트 극동국장 대리가 답신을 보내 "근거없는 보도, 잘못된 소문"이라며 얄타밀약설을 부인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7월 25일 재차 편지를 보내 얄타밀약설을 주장했다. 그는 "비밀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명한 미국인이 보증하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정보 출처를 밝힐 것"이라며 "처칠수상은 얄타에서 많은 주제가 논의됐으나 현재로서는 밝힐 수 없다고 언명했고, 그는 한국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시인 1949년 5월 2일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만나서도 얄타밀약설을 언급했다. 무초대사가 작성해 본국에 보고한 대화록은 "이승만 대통령은 40년 동안 두 차례 미국이 한국을 버렸다고 말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첫 번째로 한국을 버렸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얄타에서 두번째로 한국을 버렸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처칠 "얄타결정 포츠담서 번복 안돼" = 영국 처칠은 얄타회담에 이은 포츠담회담 도중인 1945년 7월 22일 얄타밀약설을 언급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처칠은 "한반도 및 이탈리아 식민지처럼 추축국들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의 입지가 얄타에서 비밀리에,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결정됐다. 당시 결정사항을 여기서 번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포츠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과 더불어 이탈리아 식민지를 신탁통치 지역으로 만드는 방안과 관련해 논의를 요청하자, 처칠은 얄타회담 당시 각국 정상차원에서 이들 문제와 관련해 비밀리에 결정된 것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얄타회담 당시 소련주재 미국대사로서 스탈린과 루즈벨트의 비밀회동에 참석했던 유일한 미국인 애버럴 해리먼도 얄타에서 밀약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버지니아대학 역사학과 류샤오위안 교수가 1996년 펴낸 '무질서에 대한 파트너십: 중국, 미국 및 일본 제국의 전후처리에 대한 정책, 1941~1945(A Partnership for Disorder: China, the United States, and Their Policies for the Postwar Disposition of the Japanese Empire, 1941~1945)'를 보면, 해리먼 대사는 1945년 5월 15일 "루즈벨트와 스탈린이…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에 관해 구두 합의했다"라고 당시 회동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증언했다. 당시 해리먼은 미 국무장관, 육군 및 해군장관과 비밀회동을 했는데, 이는 루즈벨트가 사망하면서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문서로 명시된 한반도 분할점령 = 조선대학교 기광서 교수가 2014년 발굴해 발표한 소련측 자료도 얄타회담에서 미소가 한반도 분할 점령을 약속했음을 보여준다. 1945년 6월 29일자 주중 소련대사 스크보르초프와 중국공산당 왕뤄페이의 대담록에는 얄타밀약 내용을 포함해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또다른 내용, 어떠한 공식문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상세히 담겨있다. 본문, 부록, 기타항목으로 구성된 문서 중 '기타항목' 1번은 '조선에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한다. 조선에서 일본을 구축한 후 소, 미, 중 3국의 보호관제(protectorate)가 실시된다'고 적었다. 권영근 박사는 "소련군과 미군이 합동 군사작전을 위해 조선에 진주해 일본을 몰아낸 후 소련이 한반도 이북 지역을, 미국이 이남 지역을 점령하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미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한경 박사도 1947년 쓴 '러시아인이 한국에 왔다(The Russian Came to Korea)'는 책에서 "(얄타에서) 공식적으로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대항한 합동작전 측면에서 러시아군이 38선 이북을 점령하는 한편 미군이 이남지역을 점령하기로 잠정 합의했다.…자국의 세력팽창 계획을 구상한 19세기 말경부터 러시아는 38선을 아시아대륙에서의 세력팽창 측면에서 최소한 고수해야 할 선(線)으로 생각했다"고 적었다.

◆미군정 책임자와 국무성 담당도 증언 = 1945년부터 3년간 호남지역 미군정 책임자였던 미드 그랜트와 1945년 당시 미 국무성 한국데스크에 근무했던 맥큔도 얄타밀약을 증언했다.

미드 그랜트가 1951년 쓴 '한반도에서의 미군정(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은 "얄타에서의 미소회담에서 러시아가 38선 이북지역을 점령하는 반면 미국이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기로 합의했다"면서도 "정한경 박사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자국의 오랜 한반도정책을 고려하여 38선을 분단선으로 설정할 것을 루즈벨트에게 촉구했다고 주장했지만, 어느 권위 있는 인사는 당시 38선 분할 점령을 제안한 것이 연합국의 군사 지도자였으며, 이것을 소련이 수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얄타에서 정상간 합의에 이어) 포츠담회담 당시 미국과 소련의 참모총장들이 38선을 남북한 분단선으로 선정했다.…38선이 일시적인 분단선에 불과했다는 미국 주장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기간동안 38선 분할을 지속하기로 양국이 합의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로 인해 이것이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맥큔은 1947년 쓴 '한국: 광복 원년(Korea: The First Year of Liberation)'이란 논문에서 "38선 분할 점령의 단초는 독일군이 항복한 후 3개월 이내에 대일전쟁에 참전할 의사가 있음을 소련이 구체적으로 표명한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이었다. 얄타회담의 참모회의에서 한반도 북쪽지역을 소련군 작전지역으로, 남쪽지역을 미군 작전지역으로 정한 것이다. 그후 5개월 이후인 포츠담회담에서 참모총장 수준에서 압록강과 대한해협의 정중앙에 위치한 38선을 미국과 소련의 작전지역으로 구분하는 선으로 정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분할 점령을 미소가 합의한 후 포츠담에서 각국 참모총장 차원에서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아이젠하워 "얄타에서 북한점령 허용" 비판 = 얄타밀약의 또 다른 증거는 1945년 5월 맥아더사령부가 작성한 한반도 점령계획이다.

1945년 5월이란 시점은 얄타회담(1945년 2월)후 포츠담회담(1945년 7월)전이다. 맥아더는 한반도 점령계획을 3단계로 구상했다. 1단계에서 서울과 인천지역을, 2단계에서 부산지역을, 3단계에서 군산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이다. 즉 38선 이남지역을 점령한다는 계획이다. 권영근 박사는 "이는 얄타에서 38선 분할과 관련해 모종의 합의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얄타밀약을 언급했다. 1960년 9월 14일 주한미국 대사 맥커너히(McConaughy)를 만난 자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얄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이 소련군의 북한 진입을 허용해주었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문서 1958~1960 제18권은 "아이젠하워는 루즈벨트와 처칠이 얄타에서 공산군이 북한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준 것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비하시키지 말라고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본인이 요청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아이젠하워가 얄타에서 북한을 소련이 점령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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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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