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진실을 찾아 ② | 신탁통치의 이면

하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왜곡 … 찬탁·반탁 대혼란

2021-09-09 00:00:01 게재

전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원했다. 소련은 통일한반도 정부가 수립되면 자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같은 이유로 소련은 테헤란, 얄타, 포츠담에서 지속적으로 통일 한반도정부의 즉각 수립을 원했다.

루즈벨트는 일정 기간 동안의 4개국 신탁통치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루즈벨트가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을 공식 거론한 1943년 당시부터 미국에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1945년 12월 16~26일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배빈,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만나 열린 모스크바 3상 회의 모습.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특히 미 군부가 이처럼 생각했다. 한반도에 진입한 1945년 9월 8일 당시 미 군정장관 하지, 하지의 정책 자문관 랭던, 베닝호프와 같은 사람들은 남한에 반공 성향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야만이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상태에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배빈,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1945년 12월 16~26일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 즉각 독립을, 미국은 일정 기간 동안의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그 타협안으로 최대한 5년 동안 조선임시 정부를 운영한 후 한반도를 통일시킬 것으로 합의했다. 구체적인 합의 사항은 △조선 독립 목적으로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 △이를 위한 방안을 미소공동위원회가 민주적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를 통해 강구 △5년 기한의 4개국(미·소·영·중) 신탁통치 실시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최초로 왜곡보도한 '태평양 성조기'지의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사진 = 서울대 정용욱 교수

하지는 이 합의안을 무산시키기 위해 한반도 분단 지속을 원하는 남한의 일부 세력을 이용했다. 하지의 노력으로 이 합의안이 무산되면서 한반도가 분단된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임시정부'에 방점 = 1943년 3월 27일 루즈벨트는 한반도를 소련, 중국, 미국을 포함한 3국 또는 4국이 신탁통치할 것을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제안했고, 그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이를 거론했다. 일정기간 동안 신탁통치 후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안이다.

반면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내심 반대하며 한반도의 즉각 독립을 원했다. 예를 들면, 1945년 11월 소련주재 미국대사 해리먼은 번스 장관이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거론할 당시, 소련이 침묵을 지켰던 반면 몇몇 포럼에서 조선의 즉각 독립을 주장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싫어하는 이유를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는 경우 소련이 3표 또는 4표 가운데 1표를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안은 무역, 운송, 화폐 등 문제를 소련군과 미군이 함께 관리하는 공동사령부 창설의 촉구였다. 입법·사법·행정 기능을 수행할 4개국 신탁통치 기구가 이같은 임시기구를 대체하고 조선이 독립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까지 신탁통치할 예정이었다. 미국의 제안에는 4개국 신탁통치 휘하에서 기능하는 조선의 행정기구나 임시정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반면에 소련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 수립과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줄 미소공동위원회 수립으로 미국 안과 차이가 있었다. 미국과 영국 대표가 소련 안을 일부 수정 후 최종 합의안으로 채택했다. 신탁통치 개념이 상당히 희석됐고, 조선임시정부에 방점이 두어졌다. 조선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미소공동위원회와 이곳이 협의한 이후에나 관련 4개국이 "최대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도출"할 예정이었다. 1945년 12월 30일 번스 장관은 "조선임시정부와 공조하여 일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적용하지 않기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신탁통치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신탁통치 반대한 하지 군정장관 =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안은 하지 중심의 미군정이 사실을 왜곡해 알리고, 그 결과 남한에서 찬탁반탁 대혼란이 벌어지며 좌초됐다. 하지는 합의안대로 최대 5년 기간의 신탁통치 후 출현할 통일한반도 정부가 소련과 우호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이유로 하지는 3상회의 결의안에 반대했다.

하지의 정책보좌관 랭던은 번스 장관에게 보낸 1945년 11월 20일자 서신에서 "신탁통치 개념을 한반도 상황에 적용할 수 없다. 신탁통치 방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 자신도 맥아더를 통해 미 합참에 보낸 서신에서 "…둘째, 조선인들은 당장 독립을 원한다. …셋째, 남한의 상황은 공산주의가 정착하기에 매우 좋은 토양이다. …다섯째, 지금 이 순간 또는 미래 어느 순간 신탁통치를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는 경우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하지는 한반도 분단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미군정, 송진우·이승만·한민당에 반탁운동 지시 = 미 국무부 빈센트가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공식 천명한 10월 20일부터 하지는 물론 랭던처럼 하지를 자문해 주던 인사들이 신탁통치 구상을 포기하거나 우회할 것을 워싱턴에 촉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는 10월 31일 한민당 당수 송진우와 만나 "신탁통치에 관한 모든 논의는 국무부 극동문제실장 빈센트 개인의 생각이고, 빈센트는 한반도정책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며 "조선인들이 일치단결하여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 나는 곧바로 한반도 독립을 인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대 5년 동안의 신탁통치 이후 통일한반도 정부 수립을 구상하고 있던 모스크바 합의안을 거부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안 찬성은 일정 기간 이후의 한반도 통일을 의미했던 반면, 반대는 한반도 분단을 의미했다.

하지를 포함한 미군정 주요 인사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산시키기 위해 송진우와 이승만, 한민당이 반탁운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대부분 조선인들이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하지는 3상회의 합의 내용이 신탁통치와 동일한 성격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은 조선의 즉각 독립을 지지한 반면, 소련이 신탁통치를 추구했다고 남한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우익 주도로 반탁·반소·반공이 동의어로 = 합의안은 서울 시간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에 공표됐다. 하지의 지침을 받은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각 독립 주장'이란 1면 머리기사를 보도했다. 사실을 180도 왜곡한 보도였다.

하루 뒤 하지는 일부 조선인들에게 신탁통치 반대를 지시했고, 30일엔 "좌익들이 한반도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미국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이와 함께,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한편, 조선의 조속한 독립을 옹호하는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신탁통치 반대 성명까지 발표했다. 트루먼 정부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남한 지역에서 반탁운동에 거센 불이 붙었고 조선인들은 소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시 반탁운동의 일환으로 김구가 태업과 시위를 주도했으나 미군정에 대항한 쿠데타 성격으로 변질되면서 하지에게 "배신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듣고 자살 소동을 벌이다 힘을 잃었고, 주도권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갔다.

12월 17일 반탁운동을 시작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에서 소련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 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반도가 분단될 것이고 내전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1월 10일 한민당 성명서는 "소련 신탁통치 옹호, 미국 즉각 독립 옹호"를 표지글로 담았고 이미 신탁통치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던 조선인들의 심기가 뒤틀리면서 전국 도처에서 반공·반소 운동이 벌어졌다.

◆반탁운동으로 친일세력이 애국세력으로 둔갑 = 반탁운동에서 우익의 주도권 장악에는 좌익측에서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좌익들이 1946년 1월 3일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알려진 바와 달리 당시 좌익이 옹호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고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안이었다. 미군정과 우익은 이것이 모스크바 또는 평양의 지시라고 공세를 폈고 이것이 효력을 발휘했다.

또 다른 사건은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의 그해 1월 15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였다. 뉴욕타임스 한국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은 박헌영이 한반도가 장기간 신탁통치를 받은 후 소련에 합병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또 다른 미국 특파원들과 한국기자들은 물론 미군정 보고서조차도 "박헌영이 조선의 즉각 독립을 지지했고, 존스턴의 보도는 완벽한 오보"라고 했다. 하지만 하지는 보도 취하를 거부했다. 박헌영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우익들은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조선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들'로 공격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지의 표현처럼 "신탁통치, 소련의 한반도 지배, 공산주의"가 동의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탁=반소=반공=애국'이란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트루먼, 합의 깨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 신탁통치 반대를 주도하면서 권한을 넘어 행동했던 하지는 결국 1946년 1월 18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워싱턴의 분위기는 하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급변했다.

해리먼이 한국을 방문해 하지를 만났다. 해리먼은 신탁통치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는 사실, 소련이 아니고 미국이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사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안을 존중해야 할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지와의 대화를 통해 해리먼 또한 한반도를 분단시켜야 만이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해리먼은 하지의 판단이 옳다고 트루먼에게 말하면서 하지의 능력과 외교력을 극찬했다.

결과적으로 트루먼 행정부는 모스크바에서의 자국의 입장을 180도 바꾼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안 찬성에서 반대로 입장을 180도 선회했다. 1947년 1월에 국무장관에 취임한 마샬은 하지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방안을 수용했다. 마샬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키로 결심했다.

통일 한반도정부 수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이같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한반도는 법적으로 분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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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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