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양성한 한국군 장교 110명 중 108명이 일본군 출신

2021-09-09 00:00:01 게재

남한지역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수립과 미군주둔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미국 영향력을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미 군정장관 하지는 부임과 동시에 정부조직 창설에 착수했다.

하지는 정당, 법조계, 군, 경찰조직을 창설했다. 하지는 이들 조직을 친일파로 포진시켰다. 하지가 이처럼 한 이유는 한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들만이 조선과 미국의 이익이 배치될 경우 미국이익을 대변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친일파를 이용해 하지는 일제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한반도 분단반대와 외세철수를 주장하던 세력들을 제거했다.

법조계는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일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당은 지주 또는 일제 치하에서 부역했던 세력을 중심으로 조직했다. 주요 문제는 군과 경찰이었다.

◆독립운동하다 투옥되면 군장교서 배제 = 1945년 12월 미군정은 남한의 국방조직 창설계획을 수립했다. 12월 5일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에서 근무하게 될 장교들에게 영어를 교육시키기 위한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했다. 1기생 60명 가운데 20명은 일본육사, 20명은 일본 관동군, 20명은 광복군 출신을 선발했다.

그러나 이범석 같은 광복군 지도자들은 국방경비대 참여를 거부했다. 이범석은 "군사정부 휘하에 국방경비대와 같은 조직을 두는 게 말이 되는가? 군대를 조직하기 이전에 국가주권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광복군은 친일세력으로 치부되었던 일본군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던 국방경비대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았다. 일부 참여한 광복군 출신들은 소수 불만세력이 됐다. 이 때문에 1기생으로 선발된 20명의 광복군 출신 가운데 장교로 임관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장교는 일제치하에서 전과기록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제에 대항에 싸우다 투옥됐던 독립투사들을 국방경비대에서 배제한 것이다.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110명의 장교가 양성됐는데, 이들 가운데 108명이 일본군 장교 또는 하사관 출신이었다. 그 후 이들 가운데 78명이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3명이 참모총장이 됐다. 국방경비대와 한국육군이 일본군 출신들의 독무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국대사관 전 문화정치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8년에 쓴 '한국: 소용돌이의 정치'에서 한국군에서 고위직을 담당했던 일본군 출신들은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본인들이 일본천황을 위해 싸웠으며 일본에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을 내심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암시했다. 이들은 조선의 이익이 아니고 일본의 이익을 대변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전후 한국 이익이 아니고 미국 이익을 기꺼이 대변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최능진 "미군정 경찰은 부패, 일제경찰, 반역자 온상" = 미군정이 일본으로부터 행정조직을 인수한 1945년 9월 조선의 경찰인력은 2만명이고, 그중 1만2000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킨 후 미군정은 조선인 출신 경찰을 그대로 승진시키고, 경찰 보조원들을 경찰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경찰력을 보강했다. 이같은 방식으로 미군은 2만명 수준의 경찰을 2만5000명으로 늘렸다. 그런데 일제 당시 한반도 전체의 경찰이 2만명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미군정은 남한의 경찰 인력을 일제 당시와 비교해 2배 이상 증원시킨 것이었다.

경찰력을 증원한 결과 범죄자가 양산되었다. 일제치하인 1944년 한반도 전체에서 5만2455명이 기소된 반면, 1946년에만 남한에서 6만3777명이 기소됐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한반도 전체에 1만6587명이 감옥에 있었던 반면, 1946년 남한에서만 1만7363명이 감옥에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정치범이었다. 해방 당시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석방됐다는 점에서 보면 일제 35년 당시와 비교해도 해방 이후 훨씬 많은 조선인들이 남한지역에서 투옥된 것이다. 소위 말해,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성향으로 또는 미군정에 대항한 결과 투옥된 것이다. 1949년 말경 남한에는 대략 3만명의 정치범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80%가 공산주의자란 혐의를 받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친일파·부패 경찰에 반발해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경우다. 당시 미군정 경찰조직인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은 1946년 11월 20일 한미 콘퍼런스에서 "(미군정 경찰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추방시킨 부패한 경찰은 물론이고 일제경찰과 반역자들의 온상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경찰들이 전혀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분 내키는대로 민간인을 연행했으며, 혹자가 특정인을 비방하는 경우 이처럼 비방당한 사람을 구금해 구타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미군정 경찰이 부패했으며, 인민의 적이다.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 남한 사람 가운데 80% 정도가 공산주의자로 변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최능진은 경찰조직에서 쫓겨났다. 최능진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최필립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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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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