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하지, 정부수립 후 '미군이 한국군·경찰 지휘' 비밀협정

2021-09-16 00:00:01 게재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후 대한민국 국회가 소집됐다. 제헌의회는 헌법제정과 함께 정부조직법을 의결했고,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8월 9일 이 대통령은 하지 미군정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귀하가 행사하고 있는 경찰,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기능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하지 중장은 "경찰,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등을 점진적으로 이양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8월 24일 이 대통령과 하지는 '잠정군사협정'을 맺고 미 전투병력이 한국에 상주하는 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이 한국 군대와 경찰을 작전 통제한다는 내용의 비밀문서에 합의했다.

◆대구 10.1, 제주 4.3, 여순 10.19사건 진압 책임자는 미군 = 1948년 8월 24일 주한미군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잠정군사협정 조인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장군의 언론발표문'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 한국의 모든 부대(경찰,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에 대한 관할권과 명령권을 가능한 한 신속히 한국 정부에 이양한다 △ 이 협정은 미 전투부대가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이후에나 효력이 있다. 즉 주한미군 전투부대가 한국에 주둔하는 한 한국군과 경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한국 군대와 경찰의 작전통제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 이전까지 벌어진 대구 10. 1사건,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진상규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투 병력을 모두 철수시킨 것은 1949년 6월 30일이다. 즉 해방 이후부터 이 시점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 군대와 경찰을 합법적으로 작전통제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보면 정부 수립 이전에 벌어진 대구 10.1 사건과 제주도 4.3사건 진압은 물론이고 1948년 10월에 벌어진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주요 책임이 미국에 있었음은 당연하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 차원에서 이들 사건을 강력히 진압했다. 그 이유는 중국대륙 공산화 가능성이 제기된 1948년 이후 미국의 대소 봉쇄전략 측면에서 한반도가 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수.순천 10.19 사건은 이승만정부 하에 계엄령 실시,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이어져 한국사회의 분단체제 공고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공식집계로만 1035명의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지난 6월 국회는 여순사건 진상규명특별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있다.

조지 카시아피카스의 2012년 책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봉기'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군사령부는 한반도 지상 전투조정관인 하우스만 대위에게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여수를 곧바로 탈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하우스만은 당시 한국군의 15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에 반군이 점령한 도시의 재탈환을 지시했다.

◆"이승만, 한국군은 미군사고문단의 군대" = 미군은 이들 사건을 참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다. 예를 들면, 카시아피카스는 앞의 책에서 "(당시 미군은) 여수 부근에 박격포를 설치한 후 여수시의 많은 부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이틀 동안 함정들이 여수시민을 겨냥해 함포를 발사했다. 37밀리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해안경비정을 인천에서 여수로 보냈다.

당시 미국의 어느 보고서는 한국군이 광적으로 시민을 겨냥해 난사하는 모습을 설명했다. 모든 시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았으며, 구일본군 제복의 경찰이 이들에게 참혹하게 보복했다. 가장 참혹한 경우는 '타이거 김'으로 알려진 일본군 상사 출신의 김종원이었다. 김종원은 사무라이칼을 이용해 많은 시민의 목을 베었다. 인민위원회가 무상배포한 흰색 신발을 신고 있던 사람들, 노동자.어부 또는 가난한 농부처럼 손이 거친 사람은 처형대상이었다. 학생과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8년 12월 6일 미국 언론인 칼 마이단스는 당시 잔혹상을 라이프지에 상세히 보도했다. 그는 국군이 체포한 5000명의 시민들을 곤봉, 쇠사슬, 개머리판으로 때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당시 하우스만의 지휘아래 한국군 장교들이 많은 민간인들을 살해했지만 미국은 하우스만이나 미국이 당시 비극과 관련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우스만은 '여수.순천사건의 진압의 계획수립 및 시행을 효율적으로 했다'는 공으로 미국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은 주한미군 전투병력이 모두 철수한 1949년 6월 30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군을 작전 통제했다. 500명의 군사고문단과 700명의 기술자들이 잔류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이처럼 미군이 한국군을 작전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4월의 본인의 75회 생일 기념식장에서 하우스만을 포함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요원들에게 "한국군이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지휘를 받는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군사고문단의 군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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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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