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진실을 찾아 ⑤│38선 북진 갈등

트루먼, 중국군 참전시키려 7월 중순부터 38선 북진 계획

2021-09-30 15:39:48 게재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정치적 목표가 두 차례 바뀌었다. 참전 당시 38선 복원이었던 유엔군의 정치적 목표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북통일로 바뀌었다. 하지만 중국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된 1950년 11월 말경 미국은 재차 38선 복원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

미국이 수행한 전쟁 가운데 이처럼 정치적 목표가 바뀐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이들 목표가 실제 목표가 아니고 명목상의 목표임을 암시해주는 부분이다.

1950년 12월 4일 트루먼 대통령(맨 왼쪽)이 집무실에서 애틀리 영국 총리(맞은편 앉은 이)와 한국전쟁에 관한 논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애치슨 국무장관(왼쪽 위)과 마샬 국방장관이 지켜보고 있다. 중국군의 반격으로 한국전쟁이 확전조짐을 보이자, 애틀리 총리가 미국으로 찾아가 6차례 회담을 했다. 당시 속기록에 따르면 이날 애틀리는 "중국에 양보를 하고 정전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애치슨 장관은 "공산측과 협상을 시작해도 안되고 한국전쟁을 종료시켜서도 안된다. 가능한 한 장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공산측과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6.25전쟁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트루먼도서관


미국의 6.25전쟁 수행은 트루먼 대통령의 지휘 아래 애치슨의 국무부가 주도했다. 국방부는 국무부를 보조하는 형태였다.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한 실제 정치적 목표는 유엔군의 일환으로 참전한 미군이 가능한 한 장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중국군과 치열하게 싸움으로써 미 국방비의 400% 증액을 통해 미군을 재무장시키고, 지구상 주요 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38선 복원이나 남북통일이 당시 미국이 추구한 정치적 목표가 아니었음은 "6.25 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남북통일이 아니란 사실을 맥아더에게 분명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는 1950년 12월 1일 애치슨 국무장관의 발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북진 허용 유엔결의안 전에 맥아더에 북진 지시 = 전쟁 발발 1개월이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중순부터 미국은 유엔군을 압록강을 겨냥해 진격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말경 38선 원상회복을 주장했던 트루먼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에 중국군이 반격하게 함으로써 한반도 이남의 특정 전선에서 유엔군과 중국군을 격돌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9월 11일 미국은 NSC-81/1이란 문서를 공식 승인했다. 여기서는 유엔군의 주요 군사목표를 북한군 격파로 정하고 맥아더의 모든 조치를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거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각 군 참모총장이 통제하게 했다. 유엔군이 한반도 전 지역에서 싸울 수 있게 했다. 단, 중국군이 참전하는 경우 한반도전쟁이 중국 대륙으로 확전되지 않게 했다.

미 합참은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9월 27일(미국 시간) 맥아더에게 38선 북진 관련 지령을 하달했다. 앞서 트루먼이 북진을 승인한 것은 9월 11일이었고, 이와 관련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정사항의 요약본이 나흘 뒤인 9월 15일 맥아더에게 전달됐다. 맥아더에게는 9월 27일 지시와 관련해 38선 이북 지역에서의 작전계획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유엔이 유엔군의 38선 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10월 7일이었다. 트루먼의 결심을 유엔이 사후 추인해준 셈이다. 하루 뒤인 10월 8일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중국군 참전 구상을 보내자 10월 9일 트루먼은 주어진 병력과 무기로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 한 한반도 도처에서 중국군과 싸워야 할 것이라는 지령을 맥아더에게 내렸다. 10월 15일 트루먼과 맥아더의 웨이크 섬 회동이 있었다. 회동 이후 맥아더는 트루먼이 미군을 포함한 모든 유엔군이 한반도 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줬고, 유엔군의 만주폭격을 허용해줬음을 암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트루먼은 6.25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켰으며, 유엔군이 주어진 자원을 갖고 중국군과 한반도에서 격돌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중국군이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에 대항하자 만주폭격과 병력증원을 허용해주지 않음으로써 유엔군 입장에서 일대 재앙이 초래되게 했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평택 부근까지 후퇴한 후 38선 부근에서 장기간 동안 중국군과 싸운 후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만든 것이다.

◆중국군과 격돌을 통한 미군 재무장 강조 = 미국이 중국군의 반격을 이용해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제 구축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1950년 11월 7일과 17일자의 미 국무성 정책기획실 보고서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책기획실의 존 데이비스는 11월 7일자 보고서에서 미국이 6.25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한편, 공산세력과의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중국군의 6.25전쟁 참전이 소련의 종용에 따른 것으로써 세계대전 가능성까지 염두에 뒀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이 6.25전쟁을 계기로 지구상 도처에서 공산세력과 세계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제한전 형태로 전쟁을 수행함과 동시에 미군 재무장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이비스는 이처럼 한반도 전쟁을 이용하고자 하는 경우 이 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대륙을 공격하는 경우 1950년 2월 체결된 중소조약으로 인해 소련이 이 전쟁에 자동 개입할 것이란 게 이유였다. 그는 세계대전 수행 준비 차원에서 방대한 규모의 미군 재무장과 더불어 나토와 일본 재무장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17일 정책기획실의 존 댐은 중국군이 6.25전쟁에 참전하는 경우 미국이 취해야 할 방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댐은 소련과 중국이 적어도 압록강 부근에 완충지대를 설치하고자 노력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유엔군 전력증강을 통한 중국군의 한반도 축출 등 네 가지 대안을 구상한 후 마지막 방책을 추천했다. 북한군 격멸 차원에서 유엔군을 압록강까지 진격시키지만, 진격 도중 중국군과 소련군의 저항에 직면하는 경우 유엔군을 평양-원산 선으로 후퇴시키고, 평양-원산 이북 지역을 공산측이 통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계대전이 초래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통한 미군 재무장 추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신속한 강화 △일본의 경제·군사적 강화와 한국·일본·미국간 병참선 확보 등을 주장했다.

◆중국군 반격 유도 위한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 = 중국군과 미군을 교전시키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1950년 11월 24일의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유엔군은 청천강 이북 산악지역에 방대한 규모의 중국군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북진했다. 한편 미 합참이 2차 압록강 진격을 통해 추구해야 할 목표와 관련해 맥아더에게 내린 11월 24일자 명령을 보면, 중국이 유엔군의 만주 진입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유엔군 진지와 압록강 사이에 완충지대를 설정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한 후 압록강 어귀부터 당시 17보병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위치로 연결되는 지역을 위쪽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압록강 이남 산악지역에 유엔군을 위치시키라고 지시했다. 2차 압록강 진격이 남북통일 목적이 아니고 중국군의 반격을 유도하여 중국군과 교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2차 압록강 진격 당일인 11월 24일 맥아더는 8군 사령부 본부가 있던 청천강 부근 신안주를 방문했다. 맥아더는 8군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 이전에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항공기가 일본을 향해 신안주를 벗어나자 8군사령관 워커는 "허튼 수작(bullshit)"부린다며 맥아더를 비난했다. 워커는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의 선봉 부대장인 21보병대장 리처드 스티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라고 처치 소장에게 지시했다.

"중국군의 음식 냄새를 맡는 순간, 곧바로 부대를 퇴각시키시오." 워커가 2차 압록강 진격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엔군의 진격에 대항해 중국군이 강력히 반격할 것이며, 이 경우 유엔군이 일대 후퇴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미 합참이 맥아더에게 내린 11월 24일자 명령에서 보듯이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한 후 특정 전선으로 후퇴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압록강까지 진격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결국 당시의 진격은 접전을 강요한 후 중국군을 평양-원산 선으로 또는 그 이남의 전선으로 유인하기 위한 성격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반격과 국가비상사태·재무장 선포 = 11월 27일 유엔사는 중국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의 성명을 냈다. 11월 28일 8군의 우측과 중앙을 겨냥한 중국군의 엄청난 공격으로 전선이 뒤로 밀렸다고 밝혔다. 이날 맥아더는 미 합참에 전문을 보내 "적군의 병력이 20만명 수준"이라면서 유엔군의 퇴각을 요청했다. 하루 뒤 합참은 이를 수락했고 도쿄의 미 8군 대변인은 유엔군의 퇴각을 밝혔다. 12월 3일 맥아더는 유엔군을 서울지역으로 철수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양지역을 고수할 수 없으며, 공산군이 압박해오면 서울 부근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워커장군의 판단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유엔군은 38선을 향해 고속으로 남진했다. 유엔군은 12월 15일경 38선 부근에 정착했다.

같은 날 트루먼은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에 대항한 중국군의 반격으로 자유진영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면서 국가비상사태와 미군 재무장을 선언했다. 트루먼은 라디오와 TV를 통한 연설에서 "12월 16일을 기점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며 "공산측이 원하는 경우 협상 할 수 있지만 소련이 초래한 엄청난 위기의 면전에서 미국이 침략에 굴복하지도 유화정책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수물자 생산을 대폭 늘리며, 미군을 증원하고, 임금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선언했다. 12월 17일 트루먼 행정부의 전쟁 동원 노력을 지시·조정하기 위한 국방동원실이 설립됐고, 아이젠하워가 나토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이에 앞서 트루먼이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하고 중국군의 반격으로 한반도전쟁이 확전될 조짐을 보이자 영국 수상 애틀리가 미국을 방문해 12월 4~8일 트루먼과 회동했다. 6.25 전쟁 수행 방식에 관한 의견 조율을 위해서다. 양국은 6.25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이지만 정전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자유진영 국가들의 재무장과 동맹체제 구축 필요성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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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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