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망 '온쇼어링'은 불가능

2022-08-03 10:55:14 게재

닛케이아시아 "주요국 막대한 보조금 불구, 칩제조 필수 재료·부품·장비 한곳에 못 모아"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이 반도체 공급망 구축 또는 복원을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내걸고 있다. 이른바 공급망 회복탄력성이다. 일본 영자 시사주간지 '닛케이아시아' 최신호는 그같은 기대를 '미신'(myth)으로 단정했다. 반도체 공급망의 복잡다단한 세계를 두 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지난달 중순 일본 현지에 긴급대응팀을 급파했다.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하면서 여러 필수장비를 주문했는데, 관련 공급업체들이 당초 약속한 기일에 인도할 수 없다는 회신을 하면서다. 일본 최대 반도체장비제조사인 도쿄일렉트론, 그리고 스크린 세미컨덕터 솔루션스는 TSMC에 "한차례 연장된 인도기일에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며 사과했다.

스크린은 반도체 제조공장에 필수적인 화학세척장비를 만드는 몇 안되는 세계적 기업이다. 이 기업은 TSMC에 이 장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밸브와 튜브 펌프 컨테이너 등 품목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알렸다.

일본뿐 아니다. 앞선 지난 3월 TSMC 공급망관리 대표 J. K. 린은 태스크포스팀을 이끌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주문한 반도체 제조장비를 인도 받기까지 장장 '18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협력업체의 응답에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닛케이아시아는 "TSMC의 사례는 주요 반도체기업과 공급업체뿐 아니라 주요국 정부에게도 불편한 진실을 던진다"며 "중국과 미국 유럽이 반도체 공급망을 '온쇼어링'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회복탄력성에 대한 기대는 미신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회복탄력성은 미신"

해외기업의 자국유치나 자국기업의 국내 아웃소싱 확대를 의미하는 온쇼어링을 위해 주요국들은 막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지난달 말 미국 상하원은 520억달러 보조금 지원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산업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일본정부는 자국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짓겠다는 TSMC에 35억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중국은 공공과 민간을 합해 모두 2210억달러의 투자를 반도체 분야로 돌리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내에 복제하기 위해서다.

 

 


닛케이아시아는 "그같은 지원금이 반도체 공급망 중 눈에 가장 잘 띄는 과정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게 문제"라며 "반도체 제조는 거미줄로 연결된 과정으로 각종 제조장비는 물론 수백개의 원자재와 화학제품 소모부품 산업가스 금속 등을 망라한다. 이 중 하나만 빠져도 고도의 정밀성을 요하는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고 지적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반도체·재료 대표 J. T. 수는 "자급자족률을 70~80%로 높이려는 목표도 극히 어렵다"며 "하물며 특정 국가, 특정 지역에서 모든 분야를 커버한다는 건 극한의 도전과제"라고 말했다.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의 반도체·재료 부사장인 옌스 리버만도 "반도체를 만들려면 재료와 화학품, 산업용 가스, 원자재 모두가 필요하다. 재료의 원천은 어디이며, 원자재는 어디서 공급 받으며, 제조는 어디서 할 것인지, 이 모든 물류작업을 누가 다룰 것인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TSMC 창업주 모리스 창은 지난해 미국에서 열린 반도체 포럼에서 "미국이 완벽한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에 재구축하길 원한다면,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며 "수천억달러를 쓴다고 해도 공급망은 여전히 불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1년여 전 주문, 이제서야 받아"

밸브 튜브 파이프 펌프 컨테이너는 보통명사다. 하지만 이런 부품이야말로 반도체 공급망의 흐름을 옥죄는 주범이다. 반도체 제조장비에 들어가는 필수부품이자 제조공장 내 독성화학물질과 초정화수를 처리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주요 반도체 기업 경영진의 피를 말리는 것들이다.

TSMC의 한 경영진은 "농담이 아니다. 밸브와 튜브를 1년도 훨씬 전에 주문했는데 이제야 받는다"며 "상자를 열었을 땐 또 다른 충격이다. 100개를 주문했는데 고작 10개만 들었을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용 밸브와 튜브 파이프 등은 완벽한 오염방지 처리가 돼야 한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는 기업은 전세계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 CKD와 어드밴스 일렉트릭, 미국의 인테그리스가 밸브의 주요 생산기업이고 일본의 이와키는 화학물질 취급 펌프의 지배적 공급자다. 오스트리아의 아그루와 스위스의 게오르그 피셔는 반도체 공장 내 주요 배관시스템의 핵심 공급업체다.

게다가 이같은 부품들이 불량국가들에 흘러들어가 군사적 용도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40개국 이상이 '바세나르협정'을 맺었다. 공급이 달리는 이 분야에 신규기업 진출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장벽이다.

여기서 한 단계 거슬러오르면 '플루오로폴리머'(불소중합체)로 불리는 특수 플라스틱이 등장한다. 반도체용 밸브와 튜브, 파이프를 만드는 데 쓰인다. 플루오로폴리머의 한 종류인 'PFA'는 미국의 케무어스와 일본의 다이킨공업이 '유이'한 공급자다.

다른 종류의 플루오로폴리머를 공급하는 기업으로는 벨기에의 솔베이, 미국의 3M, 인도의 구자라트 플루오로케미칼스, 러시아의 할로폴리머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재료 모두가 반도체용으로 쓰일 정도로 높은 등급은 아니다. 반도체 이외 다른 산업분야에서의 수요가 더 높다.

TSMC와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클린룸 시스템을 공급하는 '유나이티드 인터그레이티드 서비스'의 수석 사업개발 대표인 수춘위엔은 "플로오로폴리머 공급사는 제한적"이라며 "전기차시장 호황으로 반도체와 배터리용 수요가 치솟았다"고 말했다.

공급은 달리고, 수요는 치솟고

한 단계 더 올라가면 형석(fluorite)이 나온다. 플루오로폴리머를 뽑아내는 광물이다. 시장조사기관 '인덱스박스'에 따르면 중국이 글로벌 형석 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 중국은 1990년대 말부터 형석을 전략광물로 인식했다. 농업과 전자공학 제약 항공 우주 국방 등 주요 전략부문에 중요하게 쓰이는 광물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수출을 통제했다. 형석은 준(準) 희토류로 간주된다. 인덱스박스에 따르면 형석의 2대 생산국가는 멕시코로 지난해 약 10.8% 점유율을 차지했다. 3위와 4위는 몽골(8.2%)과 남아프리카공화국(4.5%)이다. 유럽국가인 불가리아와 스페인을 합쳐 약 5% 점유율을 보인다.

미국 백악관이 지난해 발간한 '공급망 재검토 백서'는 형석을 '공급이 부족한 전략적 재료' '외국의 지배력에 취약한 주요 광물'로 꼽았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형석과 반도체의 연관성을 기술하지는 않았다.

리소그래피(실리콘 웨이퍼에 회로패턴을 형성하는 공정)에 쓰이는 '네온'이나 에칭(반도체 식각)에 쓰이는 '육불화부타디엔'(C4F6) 등의 산업용 가스도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다. 두 가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주요 공급국가인데, 양국간 전쟁으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이 가스들을 옮기는 장비를 만드는 것 역시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

룩셈부르크의 로타렉스, 그리고 일본의 BBB네리키, 하마이 인더스트리 등 소수 기업이 반도체 부문 가스실린더에 쓰이는 초고순도 밸브를 공급한다. 로타렉스의 시장점유율은 80%에 육박하고 룩셈부르크 내에서만 그같은 특수 부품을 생산한다.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드는 반도체용 밸브는 광범위한 검증 절차와 정부 승인을 거쳐야 한다. 누출과 폭발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신생기업이 관련 기준을 맞춰 각국의 승인을 얻으려면 최소 10년에서 최장 20년이 소요될 전망이다.

▶ 8월 5일 금요일자에 이어집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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