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쟁, 유럽 저력도 만만찮아

2022-11-30 11:46:21 게재

유럽, 미국 보조금에 우려

도이체벨레 "생태계 중요"

미국이나 유럽에 반도체공장 신설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독일 인피니온은 드레스덴에, 미국 인텔은 마그데부르크에 짓길 원한다. 대만 TSMC도 독일에 공장을 짓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미국정부는 이미 TSMC와 한국 삼성전자를 자국에 끌어들였다. 이들 기업은 수십억달러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다. 보조금이 핵심이다. 바이든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3700억달러를 지출할 계획이다. 게다가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2800억달러를 쓴다. 반도체분야를 강화하고 연구개발을 촉진하며 하이테크센터를 구축할 방침이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는 29일 "유럽 기술기업들이 미국 보조금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을까. EU반도체법만으로 충분할까"라며 "유럽도 430억유로를 책정해 글로벌 반도체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두배 늘릴 계획"이라고 전했다.

오스트리아 기술기업 AT&S의 대표 안드레아스 게르슈텐마이너는 29일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에 "유럽은 발표에선 세계 챔피언이지만 실행엔 젬병"이라며 "유럽이 주는 보조금은 너무 적어 글로벌시장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도체 오랜 역사

유럽엔 두려움이 있다. 주요 기업들이 유럽을 건너뛰고 미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글로벌 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자회사 '스트래티지&'의 반도체 전문가 마커스 글로거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유럽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비중이 10%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본다. 중요한 지식, 숙련된 노동력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계산법이라는 것.

글로거는 DW에 "유럽은 자신을 완전히 과소평가하고 있다. 공장은 어디서나 지어질 수 있다. 문제는 그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전문가를 갖고 있느냐는 점"이라며 "유럽은 반도체와 관련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유럽에선 반도체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을 많이 보유했다"고 말했다.

이런 곳 중 하나는 벨기에 반도체공동연구소인 'IMEC'다. 글로벌 빅테크 경쟁기업들도 이곳에서 함께 연구를 수행한다. 독일 뮌헨엔 '실리콘 작센'이, 프랑스 그르노블엔 대학들이 밀집한 학술도시도 있다. 유럽에 EU반도체법만 있는 게 아니다. 유럽회복기금은 미국으로 치면 인플레이션감축법이다. 2030년까지 1조9000억유로 예산이 책정됐다.

EU위원회는 유럽이 최고급 반도체와 슈퍼컴퓨팅을 가져야 한다는 캠페인을 펴고 있다. 글로거는 "EU는 디지털주권이 공급망 확보보다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물인터넷이 진화하고 국가와 사회가 인공지능(AI)을 통해 디지털화할수록 기술주권 확보는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

전세계 4대의 슈퍼컴 중 2대가 유럽에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와 핀란드다. 그리고 2024년 독일 율리히에 첫번째 엑사급(초당 백경배 연산) 슈퍼컴이 가동된다. '주피터'로 불리는 이 슈퍼컴은 최신 노트북 500만개를 합친 것보다 성능이 우수하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또 다른 엑사 슈퍼컴이 예정돼 있다.

현금지원만으론 불충분

글로거에 따르면, 가장 많은 보조금을 주는 곳으로 기업이 갈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반도체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반도체 제조공장을 짓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재료와 연구개발 역시 필요하다. 관련 기업들의 전반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개발은 유럽이 여전히 선두에 선 부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엔 유럽 최대 응용과학연구소인 '프라운호퍼'와 '막스플랑크연구소'가 인더스트리4.0 개발에 선두를 달리고 있다. '라이프니츠연구소'와 '페르디난트 브라운 연구소' 역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

독일은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드레스덴 인근 마이크로칩 클러스터인 실리콘 작센에서는 약 200개의 기업들이 반도체 사업을 협업한다. 공급체들에게 이런 인프라는 '지원을 요청할 경우 며칠이 아니라 몇분 내에 접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중요하다. 반도체공장에서 잠깐의 지연(딜레이)은 수천만유로의 불필요한 비용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최고의 인재와 최첨단 연구개발단지, 선도적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갖고 있다. 네덜란드 'ASML'과 같은 대체불가능한 공급업체, 산업광학기업 '자이스'나 산업용 레이저기업 '트럼프'도 유럽에 있다. 산업용 가스나 청정룸 기술에 뛰어난 제조사들도 여럿 있다.

글로거는 "여기서 부족한 건 실행의 속도"라며 "유럽은 더 과감히, 더 결연히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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