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재정의 화수분’ 막히나

2024-12-13 13:00:02 게재

트럼프 2기 법인세 대폭 인하 예고 … 빅테크들 “미국 유턴” 가능성

총선 승리에 기뻐하는 아일랜드 공화당의 미할 마틴 전 총리. 공화당과 통일아일랜드당등 연립정부 지도부는 내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새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연정협상에 돌입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아일랜드는 스스로를 ‘슬픈 나라’라고 부른다. 1922년 독립할 때까지 750여년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도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한다. 아일랜드는 유럽의 약소국이자 최빈국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번졌다. 여러 해 동안 감자 흉작이 이어지면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100만여명이 굶어 죽었고, 200만여명이 미국과 남미 등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850여만명이던 인구가 600만여명으로 줄었다. 훗날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은 당시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의 후손이다.

1인당 GDP 10만달러 넘어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일랜드는 빚에 허덕이던 나라였다. 2011년 금융위기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채권단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달러를 넘어서는 부자나라로 성장했다. 2021년 IMF 자료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0만2390달러로 룩셈부르크(13만1300달러)에 이어 2위다. 과거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의 경우 4만6200달러로 21위에 그친다. 기업이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과감하게 산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다.

특히 올해 아일랜드는 돈벼락을 맞았다. 법인세 수입 증가 등에 힘입어 86억유로(약 12조7500억원)의 재정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거기에 미국의 빅테크 기업 애플로부터 총 143억유로(약 21조원)의 체납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됐다. EU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지난 9월 “애플이 2016년 아일랜드로부터 받은 조세 혜택이 EU의 정부 보조금 규정을 어겼다”면서 과징금 130억유로(약19조5600억원)에 이자까지 더해 아일랜드정부에 내라고 판결했다.

아일랜드는 어떻게 10여년 만에 세계 최고 부자나라로 발돋움했을까? 알려진 대로 아일랜드는 2010년대 초반 국제채권단 구제금융 당시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24%던 법인세율을 12.5%까지 과감히 낮추면서 외국기업 유치에 공을 들였다.

덕분에 애플과 알파벳(구글 모회사)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화이자 MSD 암젠 등 정보기술(IT)과 제약분야의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더블린에 둥지를 틀었다. 이들 외국기업들은 아일랜드에서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막대한 세금을 냈다. 아일랜드는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의 합의에 따라 법인세율을 15%로 상향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트럼프 돌발변수 만난 아일랜드

그렇게 잘 나가던 아일랜드가 최근 돌발변수를 만났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 당선인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공약으로 내세운 파격적인 조세정책이 아일랜드 세수와 수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8일 ‘트럼프 집권기 세금의 함의(Business Tax Implications of a Trump Presidency)’라는 기사를 통해 트럼프 당선인의 조세정책 청사진을 상세히 보도했다.

WSJ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2기 조세정책의 핵심은 ‘법인세는 내리고 관세는 올리는’ 것이다. 트럼프는 현행 21%인 법인세율을 아일랜드와 같은 수준인 15%까지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또한 해외생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계획이다. 멕시코 및 캐나다 수입품에 25%, 중국 수입품에 10%의 추가관세를, 기타 국가 수입품에는 10~20%의 ‘보편적’ 관세를 부과할 예정이다.

트럼프는 지난 9월 조지아주 사바나에서 한 연설에서 “15% 법인세율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들게 될 것”이라면서 “이는 미국에서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만 해당된다”고 말했다. 관세와 관련해서는 “멕시코에 있는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에 100%의 세금이 부과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의 이같은 조세정책은 낮은 법인세율로 외국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는 아일랜드를 긴장시키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조세정책으로 아일랜드에 본사나 공장을 두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아일랜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다. 현재 1000여개의 미국 기업이 아일랜드 노동력의 약 15%를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이 내는 세금은 아일랜드 전체 세수의 60%를 차지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9일 ‘아일랜드 총선 정국을 달구는 트럼프 조세 위협(Ireland heads to the polls as Trump’s tax threat looms)’이라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FT는 트럼프가 돈을 쏟아내는 아일랜드의 ‘재정 화수분(gushing fiscal taps)’을 틀어막을 위험이 있다고 전망했다.

아일랜드 정당들은 지난달 29일 치러진 총선 과정에서 막대한 규모의 재정 지출과 세금 감면을 약속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세수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FT는 “트럼프는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법인세를 6%p 인하한다는 달콤한 제안을 하고 있다”면서 “이는 아일랜드 법인세인 15%와 같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FT는 아일랜드에 본사 또는 대규모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 기업들 덕분에 아일랜드가 부유해졌지만, 트럼프의 법인세 인하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일랜드는 올해 300억유로(약 45조1400억원)의 법인세 수입과 240억유로(약36조1178억원)의 예산 흑자를 예상하고 있다. 아일랜드 재정자문위원회에 따르면 전체 법인세 수입 중 43%가 3개 미국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인 것이다.

온라인 미디어 사이트 ‘더 커런시’는 이들 세 기업은 MS와 애플, 화이자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세무회계 전문가인 브렌든 머피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법인 세금 영수증의 80% 이상과 급여 세금 영수증의 50% 이상이 미국 다국적 기업에서 발생한다”고 밝혔다.

대미 무역흑자 310억유로

트럼프는 법인세 인상뿐 아니라 무역 부문에서도 아일랜드를 긴장시키고 있다. 아일랜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아일랜드의 대미 수출은 540억유로(약 81조2651억원)를 기록한 반면 수입은 230억유로에 그쳤다. 아일랜드가 한해 무려 310억유로(약34조6129억원)의 대미 무역흑자를 거둔 것이다. 트럼프 2기 상무장관 지명자인 하워드 루트닉은 지난 10월 “아일랜드가 우리의 희생을 바탕으로 무역 흑자를 내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비난했다.

아일랜드정부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을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총선을 치른 아일랜드는 지금 새로운 연립정부 구성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공화당과 통일아일랜드당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연립정부는 총 174개 의석 중 과반에 2석 부족한 86석을 차지했다. 미할 마틴 전 총리가 이끄는 공화당과 사이먼 해리스 총리의 통일아일랜드당은 각각 48석과 38석이다. 공화당과 통일아일랜드당은 이미 49석을 차지한 신페인당과의 연합 가능성을 일찌감치 배제했기 때문에 소수당이나 무소속(16명) 당선인들과 연합할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의 ‘PA 미디어’는 공화당이 통일아일랜드당과 10석 차이로 최대 의석을 확보한 만큼 공화당 대표인 마틴 전 총리가 한번 더 총리를 지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공화당과 통일아일랜드당 지도부는 내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새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연정협상에 돌입했다. 트럼프 취임 전까지 연립정부를 안정적으로 구성함으로써 트럼프의 조세정책이나 무역협상 등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겠다는 계산이다.

남의 나라 걱정할 때가 아니다. ‘12・3 내란사태’로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고 있다. 나흘간 주식시장에서 총 140조원이 증발했고 환율은 1430원 중반까지 급등했다. 트럼프2기의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할 시점에 무정부상태를 방불하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한국이 ‘슬픈 나라’다.

박상주 칼럼니스트, 지구촌 순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