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력난에 가스터빈 대란…환경 역주행
빅3 납기 3년 이상 기다려 두산도 공급망 신규진입
과거 몇 년 동안 재생에너지의 급부상과 ‘탄소 순 배출 제로’ 공약에 밀려 텅 비어있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MHI)의 가스 터빈 조립 라인이 2025년 현재 창사 이래 최대 생산량을 찍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22일(현지시간) 전했다.
미국 GE 버노바 34%, MHI 27%, 독일 지멘스 에너지 24% 등 세계 가스 터빈 공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3대 제조업체의 시장이 붕괴될 것으로 예측되던 불과 몇 년 전과는 완전히 판이 뒤바뀐 상황이다. 실제로 지멘스 에너지는 2017년 대형 가스 터빈 수요가 업계 생산 능력(연 400기) 대비 110기 수준으로 정체될 것으로 내다보며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에너지 전문 컨설팅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가스 터빈 주문량은 1025기로 예측되며, 이 중 대형 터빈은 183기로 2011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FT는 AI 열풍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미 에너지부(DoE)는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8년까지 미국 전체의 12%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한다. 연중무휴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하는 AI 확장에 따라 미국은 신규 가스 발전소 건설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 에너지 기업 엔터지는 메타의 초대형 데이터센터와 연결된 가스 발전소 3곳을 루이지애나에 짓고 있다.
그러나 가스 터빈은 천연가스 연소 과정에서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이산화탄소와 스모그 및 산성비를 일으키는 질소산화물을 배출한다. 기후 운동가들은 이 같은 수요가 지구 온난화를 2℃ 이하로 제한하기로 한 2015년 파리 기후 협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한다.
특히 LNG 수출의 주요 성장 시장이던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그동안 석탄에서 재생에너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연료’로 여겨지던 LNG를 기반으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해왔으나, 터빈 공급 부족으로 가스 발전소 완공이 늦춰지면서 향후 4~5년간 전력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에너지 분석가들은 가스 발전기 확보난과 취약한 송전망 문제로 재생에너지 확대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결국 중국 기술을 이용한 석탄 발전소에 의존하게 될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한다.
LNG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베트남과 필리핀은 LNG 발전 목표 달성에 실패할 것으로 예측된다. 베트남의 한 에너지 프로젝트 개발자는 “터빈 주문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3년 내 가동 목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동남아시아 공장들이 전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떨어지고, 글로벌 공급망의 주요 생산기지가 흔들릴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터빈 부족 사태가 역설적으로 동남아시아 경제가 수십 년 동안 화석 연료에 묶이는 것을 피하고 태양광, 배터리,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앞당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도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지멘스 에너지 CEO 크리스티안 부흐는 동남아시아의 가장 큰 문제로 취약한 전력망을 지적하며, 이는 석탄에서 가스로의 전환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FT는 전망했다.
한편, 이번 글로벌 공급망 마비는 수주 실적이 전무했던 한국의 두산에너빌리티가 미국 빅테크 기업에 380MW급 가스터빈 2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빅테크 기업들이 빅3의 긴 납기 리스크를 피하고 공급망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