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추천하는 오늘의 시집 │국수 삶는 저녁

뜻밖의 청신함과 곰삭은 달달함

2015-11-27 11:24:06 게재
박시우 지음 / 애지 / 9000원

오래 묵은 시들은 어떤 맛이 날까. 묵은내가 날 거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뜻밖의 청신함과 곰삭은 달달함이 거기에는 깃들어 있다. 나는 박시우 시들에서 그 깊은 맛을 느낀다. 그가 시를 발표한지 26년만에 첫 시집을 묶어냈다. 우선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부터 전한다.

글을 써본 이는 알겠지만, 멈춘 글을 다시 재개하는 것은 몹시 버거운 일이다. 며칠만 젖혀두었다가 다시 쓰려고 해도 글은 나를 밀어낸다. 그런데 26년이라고 하지 않나. 26년을 모조리 쉰 것은 아니겠으되 편히 이어지지도 않았을 터. 그 이질감 극복하기란 참으로 지난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고마울밖에.

그래 그런지, 시집 페이지를 넘기는 내 눈길도 꽤 오래 한 편 한 편을 더듬는다. 어떤 애틋함이 곳곳에 스며 있는 것처럼 더디다. 그러다가 내 눈길은 몇 편의 시들에서 더 오래도록 머물렀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제목은 들었음직한 명찰을 달고 있는 시들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랩소디 인 블루' '짐노페디'.

제목만으로는, 왠지 고전적이고 고답적인 시들일 것 같다. 하지만, 천만에. 그의 행보는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만다. 예컨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자.

그가 말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지금은 다 사라진 골목길/ 요꼬기계 돌리던 어린 여공들/ 기타소리 들리던 그 방"에 가닿는다. 그 선율에는 애조 띈 연가풍은 없다. 잔업과 야근에 착취당하던 어린 여공들이 어설프게 튕기던 안타까움만 들려올 뿐이다.

게다가 거기는 어디인가 하면, "부엌에서는 고사리 삶는 냄새"나고 "마당에서는 장마철 개 비린내" 풍겨오는 역한 방이다. 알함브라 궁전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이 해학 같은 역설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이질적인 결합이지만, 박시우가 느끼기에 이 조합은 당대의 실제였던 것이다.

저와 같은 환경에서 나라면 어떤 꿈을 꾸게 될까, 하고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길 때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선율이 홀연, 달라졌다. 참 다감해진 것이다.

나는 이 음악을 이처럼 따사롭게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 "요꼬기계 돌리던 어린 여공들"의 연주가 음악을, 나를 이처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와 '랩소디 인 블루', '짐노페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흐릿한 정조만 제공할 뿐이던 음악이 시의 숨결들과 섞이는 어느 순간에, 묘한 울림으로 나를 감아 도는 것이다. 시를 알자 음악이 열린 것인가, 음악을 느끼자 시가 깊어진 것인가.

그런데 실은, 득의(得意)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는 '달의 뒤편' '풍랑주의보' 같은 시를 먼저 언급했어야 한다. 박시우 시의 매혹은, '어둔 그늘에서 피어나는 생생한 날것'에도 있는데 이들 시가 그 날것의 정조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다. 입말투로 써내려간 '달의 뒤편'을 보라. 느른한 퇴폐가 사뭇 도발적이다. 바닷사내들의 하루를 리얼하게 묘사한 '풍랑주의보'는 또 어떤가. 삶의 예리한 단면으로 후끈하다.

그리고 '국수 삶는 저녁'. 박시우 시집은 이 시로 더욱 두터워진다. 달리 표제작이 아니다.

국수와 빗줄기와 가늘어진 아내의 앙상블이 시 전체를 아우르며 심금을 울린다. 게다가 "꽉 막힌 도로가 냄비 안에서 익어"가고 "지친 아내가 유리창에 습자지처럼 붙는다"니. '국수 삶는 저녁'이 포괄하는 서민의 애환이 비유의 현란함 속에서도 적실하지 않은가. 이미지화된 서정의 현대성이 환하다.

정우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