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턴 프로젝트(월가가 자금 지원하는 미국 유력 씽크탱크), 민주당은 월가와 어떻게 결탁하는가
막후실력자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해부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인형극 아래 기업과 금융엘리트가 이끄는 과두제집권층이 미국의 정책을 주무르고 있다. 4년마다 열리는 대선 캠페인에서 정치배우들은 평등과 정의 평화 자율규제 공익 등 진보적 언사를 쏟아내며 경쟁한다. 민주 공화 양당 후보들은 막후에서 모든 걸 지휘하는 선출되지 않은 금권 정치가들에 사로잡힌 상태다.
선거에서 이긴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선거과정에서 나온 공약을 실현하리라 믿었던 유권자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변화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은 또 다시 배신을 당한다. 사실은 선거 전 이미 여러차례 '기대난망'이라는 단초가 있었지만, 유권자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현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의회 통과를 밀어붙이며 자신의 경제적 업적을 완성하려 하고 있다. UC버클리대 교수 로버트 라이시는 "만약 TPP가 통과된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친기업적 행보를 보인 정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월가 금융권 중심의 정책을 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바마는 지난 8년간 재임시절 최상위 0.1%의 부자가 미국민 90%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가져가도록 길을 닦았다. 반면 미국 전체 아동의 1/5, 흑인 아동으로 좁히면 10명당 4명이 연방정부가 정한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바마의 '거짓진보주의' 덕분에 오바마 1기 재임 4년 동안 미국이 새로 만들어낸 소득 95%는 최상위 0.1% 부자들에게 집중됐다. 그는 1929년 대공황 이래 최악의 빈부격차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미 대선 결과 좌우하는 막후실세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를 비롯한 미국 내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기업편애 정책에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부터 그같은 암울한 전조가 보였음을 깨달았어야 한다.
수많은 증거가 있지만, 그중 백미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씽크탱크인 '해밀턴프로젝트'(THP)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헌신이다. THP는 2006년 봄 금융계의 거물기업인 골드만삭스가 재원을 대 설립됐다. 친민주당 계열의 브루킹스연구소 등 중도주의적 명망가들이 활동하는 단체다. THP 설립자는 다름 아닌 로버트 루빈 전 골드만삭스 CEO다.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경제회의 보좌관과 재무장관을 지냈다. 농반 진반으로 '장막 뒤에 숨은 마법사'로 불리는 루빈은 자타 공인 민주당의 전설적 킹메이커다. 그는 현재 월가 씽크탱크인 '외교협회'(CFR) 공동의장이기도 하다. CFR은 미국 대외정책의 골간을 제시하는 막강한 영향력의 기관으로, 다국적 금융기업이 전 세계를 침투할 수 있도록 돕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
CFR과 '균형예산' '자유무역' '금융규제 철폐' 등 삼위일체를 특징으로 하는 루비노믹스(루빈의 경제철학)의 도움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미자유협정(NAFTA)을 밀어붙였고, 은행지주회사가 다른 주의 은행을 매수해 지점으로 둘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을 불허한 '글래스-스티걸법'을 폐지했다. 게다가 '상품선물현대화법'을 제정해 금융파생상품을 장외에서 거래하지 못하도록 한 규제마저 없애버렸다. 그 결과 미국의 부는 극소수 부유층과 권력층으로 쏠리게 됐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낳은 발판이 제대로 마련됐다.
1999년 루빈은 클린턴 행정부를 떠났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건국의 주역이자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 이후 최고의 재무장관이었다"고 칭송했다. 그는 퇴임 직후 씨티그룹 공동회장으로 취임했다. 상업-투자은행 겸업 금지 폐지로 가장 막대한 이득을 본 은행이다.1836년 창간한 금융전문지 '아메리칸뱅커'는 당시 "은행과 백악관을 넘나드는 회전문 인사정책의 대표적 표본"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클린턴 곁을 떠났지만 루빈은 정치와 정책에 관여하는 것까지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해 월가의 자금줄을 오바마와 이어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미국의 유명 탐사전문 기자 그레그 팰러스트는 "오바마에게 월가 금고를 열어준 이가 바로 루빈"이라며 "2008년 대선 때 오바마의 선거자금 모금액은 공화당 경쟁자에 비해 3배가 넘었는데,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그래프 참조).
루빈은 오바마 대통령의 비공식 자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자신과 호형호제하던 후배들을 행정부 고위관료로 속속 집어넣었다. 오바마 행정부 첫 재무장관인 티모시 가이트너, 첫 백악관 예산국 국장인 피터 오재그, 첫 수석경제보좌관인 래리 서머스 등이 모두 루빈 사단이다.
회전문 인사는 루빈에 그치지 않았다. 가이트너는 월가의 대형사모펀드인 '워버그핀커스' 회장으로, 오재그는 씨티그룹 부회장으로, 서머스는 미국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을 거쳐 현재 찰스엘리엇대 교수와 하버드대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신자유주의, '제3의 길'을 택하다
THP의 창립선언문은 루빈과 오재그가 작성했다. '경제성장을 이끌고 개인의 기회를 늘리고, 투자진작을 위한 정부의 적절한 역할을 이끌겠다'는 게 선언문 골자다. 미국의 유명 정치경제학자인 제이미 펙은 "THP의 선언문은 달리 표현하면 균형재정정책과 자유무역, 시장친화 정책, 불평등 대처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저명한 국제관계학 교수인 바스티안 반 아펠두른은 "루빈의 THP가 지난 10년간 맡은 역할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며 "미국 엘리트들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성을 해치는 불평등의 급속한 확산을 대단히 걱정하고 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보호주의로 회귀하자는 반발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의 집권층은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는 대규모 시위나 올해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약진, 괴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열광 등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THP는 창립 때부터 루빈이 키워낸 신자유주의 경제학 엘리트와 연방정부 고위관료들을 채용해왔다. 오재그를 비롯해 제이슨 퍼먼(경제자문위원회 의장), 더그 엘멘도프(의회예산국장), 마이클 그린스톤(경제자문위 수석연구원) 등이다. THP 자문단은 골드만삭스 임직원들로 구성돼 있다.
월가 비위맞추기 나선 오바마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2006년 4월 THP 창립총회에 기조연설을 맡았다. 루빈과 오재그, 기타 클린턴 행정부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오바마는 "미국을 번영의 길로 이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며 "당파와 이데올로기를 떠나 '경제 현대화'를 지향하는 THP 창립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또 "THP는 좌우파 이데올로기에 찌든 국가적 자본을 구원할 21세기적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제이미 펙은 "제3의 길을 연상시키는 오바마의 정제된 발언은 대선 입후보 선언을 앞두고 월가를 선제적으로 위무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헤럴드 메이어슨은 THP 출범과 관련한 기사에서 "루빈은 월가로부터 선거자금을 지원받기 원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월가 금고지기'로 인식됐다"며 "루빈이 말할 때 민주당 정치인들은 단지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맨 앞줄 자리에 앉아 수첩을 꺼내 한자 한자 받아적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오바마 역시 그같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기염을 토했다.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
지난 10년여 동안 THP는 이슈브리핑과 뉴스레터 등을 발간하며 오바마노믹스(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철학)를 구현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재그는 "THP의 발간물은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다른 말로 해석하면 외관상 진보적이지만 실제는 신자유주의적이며 월가친화적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입장은 THP의 정책 제안 전반을 관통한다. THP는 발간물을 통해 빈곤과 가계소비, 실업, 자동화, 불평등, 건강보험 이슈, 고용장벽, 줄어드는 사회안전망, 과도한 투옥, 환경오염 등 '따뜻한 가슴'과 관련한 진보적 주제들을 자세히 다룬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을 '차가운 머리'로 다루는 데엔 실패한다. 즉 성장의 불평등한 분배와 기업, 금융엘리트의 혜택 독점에 대한 근본적 처방은 외면한다.
지난 6월 THP 브리핑 제목은 '돈이 어디로 가는가 : 지난 30년간 가구소비 성향의 변화'였다. 1984~2014년 사이 저소득가구의 실질소비가 줄었고 소득 가운데 의식주 등 기본생계비에 할애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는 진단을 담았다. 하지만 일반인 소득 가운데 대출 이자비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진단은 하지 않았다. 이자비용은 월가 거대금융기관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가구당 평균 빚이 1991년엔 가처분소득의 83%에 불과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땐 130%로 급증했다. 금융산업이 미국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THP 브리핑 저자들은 '사회안전망을 높여야 한다'는 미적지근한 처방으로 글을 맺었다.
저소득 백인들의 기대수명이 낮아지고 있다는 또 다른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보고서는 '이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정신과를 비롯한 병원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노동자들이 월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무차별적 승자독식 문화와 계급전쟁에서 어떻게 신음하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짜 진보정책에 해당하는 세제개편이나 부풀 대로 부푼 국방예산의 감축, 공적복지제도의 확장,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2008년 오바마와 대선경선에서 붙었다가 불륜사실이 드러나 자진사퇴한 존 에드워즈는 당시 "미국 역사상 빈곤에 대처하는 가장 위대한 프로그램은 바로 노동운동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기술격차 비유, 과연 정당한가.
THP는 미국 노동자의 경제적 불안정과 불평등을 설명하면서 '기술격차'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THP 설명에 따르면 실업과 불완전실업, 저임금 등의 문제점이 미국 전체로 퍼진 이유는 미국 노동자들이 적당한 직업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면 고숙련 일자리에 취직해 고임금을 받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THP뿐 아니다. 대규모 기업과 월가 금융기관, 학계, 행정부 고위관료들도 '기술격차'를 주워섬긴다. 이를 반증하는 수많은 실증사례가 있지만, THP는 이를 회피한다. 위스콘신-밀워키 도시정책연구소 교수인 마크 레빈은 "기술격차 이론은 강력한 이데올로기 선전 도구"라며 "미국민의 노동수준과 생활수준을 저하시키는 불평등의 근본 원인과 시장우선주의에 대한 반감을 희석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한다.
정치경제학자 고든 라퍼도 저서 '직업훈련의 기만'에서 "'기술격차 이론'이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은 탐욕스런 기업과 일자리의 해외이전, 구조적인 임금 하락 등을 비판하기보다 '모든 잘못은 나로부터 비롯됐으며, 불운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루빈의 막후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다. 진보주의를 가장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보다 거대하고 촘촘한 기업엘리트 네트워크로 무장한 제 45대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에게 계승될 것이다. 월가와 펜타곤(미 국방부)이 전적으로 지지하는 힐러리는 오바마의 유산을 뛰어넘어 다국적 기업과 월가 금융기관을 국가 정책기구와 끈끈히 연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