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아주 친밀한 폭력

아내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2016-11-04 11:17:34 게재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1만4000원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마누라와 북어는 3일에 한번씩 두드려 패야 한다"라는 폭력적인 언사를 농담으로 소비하고 폭력 남편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여성에게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면서 "애초에 '맞을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분노 조절이 어려워서 '집사람을 좀 쳤다'고 말하는 남편들은 왜 직장 상사나 길을 가는 행인에게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까.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은 이 책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사적 공간이자 안식처로 여겨지는 가정이 실은 가부장제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의식과 성별 권력 관계가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되고 학습되는 사회적, 정치적 공간이라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은 어쩌면 지금 한국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가장 적나라하고 고통스러운 보고서다. 2001년에 출간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의 개정판인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을 새로 집필하고 여러 정보를 수정, 보완했다.

인간의 '권리'와 아내의 '도리' 사이

한국 여성 대부분은 일생에 적어도 한두번 이상 애인이나 남편에게 폭력 피해를 당한다. 2009년에서 2015년까지 남편 혹은 애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기에 놓여 기사화된 여성은 모두 1051명이다. 보도된 것만 쳐도 평균 2.4일에 1명씩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폭력을 당하는 여성 중 실제로 얼마나 많은 수가 사망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통계 자료가 없을뿐더러 자살 사고사 실종으로 처리되는 죽음이 많기 때문이다. 보도가 될 정도로 '끔찍하게' 죽거나 맞아서 죽기 전에 남편을 죽여야 비로소 관심을 받게 된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이렇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거대한 폭력인 '아내 폭력'의 실상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인식을 드러낸다. 이 책은 아내 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사회 구조의 문제이며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계급 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저자는 10여년에 걸친 상담 경험과 사례 연구, 국내외 문헌 연구, 가해 남성과 피해 여성으로 이뤄진 50가구에 대한 심층면접을 바탕으로 가족 집단에서부터 공권력에 이르기까지 아내 폭력을 공공연히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가부장제 사회를 속속들이 해부한다. 가해 남성들과 피해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운명 공동체이자 평화로운 안식처라는 가족의 허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성차별 의식이 압축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으로서 가정의 민낯이 드러난다.

저자는 남성 중심 사회가 결혼 제도를 통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시민·개인·인간이 아니라 아내·며느리·어머니라는 역할로 이전시키고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로써 이 책은 매 순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아내·며느리·어머니로서의 '도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위한 현실적인 페미니즘 입문서가 된다.

아내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비롯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던 여성이 이웃이나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경우는 여전히 많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내 폭력이 문제 있는 개별 남성이 저지르는 일탈적이고 사소한 일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성차별적 가족 제도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임을 입증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인 남성과 여성은 가족 제도를 통해 '남편'과 '아내'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그 지위는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내용의 노동과 규범을 요구한다. 결혼 생활을 구성하는 부부 간의 성(性), 여성의 보살핌과 가사 노동, 남성의 임금 노동, 가정의 대표자로서 남성 가장 등 가족생활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사회에 확산돼 사회적 성별 관계 전반을 규정한다."

그런데 실제로 '생계부양자는 남성, 의존자는 여성'의 신화는 깨진 지 오래됐다. 통계청의 '2015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맞벌이 가구는 43.9%에 달했다. 임금 노동에 종사해 홀로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기혼 여성들도 많다. 그러나 달라진 현실과 상관없이 여성들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반면 남성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남성은 성역할이 여성에 비해 간소하며 남성이 실직을 하는 등 성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남편을 '패는' 아내는 드물다.

아내 폭력은 '정치적 사건'

저자는 특히 아내 폭력을 극소수 일탈 가정의 문제 혹은 개인 심리의 결과로 보는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안 때리는 남편도 많고 안 맞는 아내도 있으므로 아내 폭력은 결국 개인의 문제가 된다. 아내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 제도적 대책들이 한결같이 '가정 유지'를 목적으로 삼은 것도 이 문제가 개인·시민·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아내 폭력을 "인류의 절반을 억압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또 저자는 아내 폭력은 가족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여성 개인에 대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폭력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자'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적, 제도적 장치들은 피해자들을 제대로 돕지 못한다.

실제로 현행 가정폭력방지법의 최우선 목표는 가정의 회복이다. 그러나 상담과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 아래 가정으로 돌아간 남편들이 다시 폭력을 저지르는 재범률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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