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평창올림픽의 그림자, 가리왕산
'한 남자가 그림자 나라에 갔는데 다들 그림자들이어서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더래. 그래서 그 남잔 혼자 외로웠대.' '그림자 나라에서 외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알아? 누군가가 니 그림자를 기억해주면 되는 거야.'
2002년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나눈 대화다. 배용준을 욘사마로 등극시킨 한류의 원조급 드라마 겨울연가는 20부로 막을 내렸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가장 큰 변화는 겨울연가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이 바뀐 것이다.
서명준, 양재림 선수와 고운소리 가이드 기억해야
2월 9일 개회식과 함께 2018 평창겨울올림픽이라는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약 한달 반 동안 평창, 강릉, 정선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단련한 몸의 이야기들이 피어나고 사라져갔다. 수많은 탄성, 한숨 그리고 눈물을 자아냈던 올림픽 드라마는 3월 18일 패럴림픽 폐회식을 끝으로 종영되었다. 막 내린 올림픽 드라마를 떠올리면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스켈레톤 윤성빈과 스피드 스케이팅 메스스타트 이승훈, 그리고 크로스컨트리스키 좌식 7.5KM 신의현의 금메달만이 아니다. 기억되지 않을 수많은 그림자들을 떠올려야 한다.
남자모굴스키에 참가한 서명준 선수는 27위로 경기를 마감했다. 30명이 출전한 종목이니 뒤에서 네 번째다. 모굴스키는 두 번의 점프 점수와 속도를 합해 성적을 낸다. 서명준의 첫 번째 점프는 720도 회전이다. 예전에는 많이들 시도하던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점프대의 각도가 높아져서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기술이 되었다. 그렇다고 난이도 점수가 높은 것도 아니라 점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서명준 선수는 세상을 향해 아직도 이 기술을 하는 선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이 버린 기술을 재현하느라 올림픽 본선에 오르지 못할 뻔 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올림픽 등수가 아니라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올림픽에서 부활시키는 거였다. 경기를 마치고 그는 가장 만족스러운 최고의 올림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날 저녁 그의 일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 내 인생의 본 게임이 시작된다.'
평창드라마 마지막 회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있다. 폐막식이 있던 3월 18일 정선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알파인 스키 회전 종목에 참가한 양재림 선수와 고운소리 가이드.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출발하면 산 밑자락에 모여 있는 관중은 숨을 죽인다. 시각장애인 스키선수는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가이드의 소리에 의지해 내려오기 때문에 관중들은 입을 막고 응원한다.
그들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야 비로소 탄성을 지르며 축하한다. 양재림 선수는 마지막 회전 종목을 7위로 마감했다. 소치올림픽에서 아쉬운 4위로 마감해 이번 올림픽에서 내심 메달을 기대했던 양재림 선수는 경기를 마치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림자다.
이식대상 나무들 대부분 고사 직전
평창드라마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양재림 선수과 고운소리 가이드의 무대가 된 정선 알파인스키장이다. 스키장이 만들어진 가리왕산은 산림유전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가리왕산에는 왕사스레나무 만병초 땃두릅나무 분비나무 거제수나무 노랑무늬붓꽃 등 희귀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었다.
가리왕산은 조선 세종 때부터 500년 동안 관리해 온 숲이다. 알파인스키장 건설로 10만그루 이상의 나무가 훼손되었고 가리왕산스키장에서 이식된 전나무 분비나무 주목 등 272그루의 나무는 이미 죽거나 고사 단계에 있다. 강원도가 약속했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포스트 평창의 첫 단추는 올림픽의 그림자를 기억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 / 문화연대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