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버리든지 적자를 용인하든지
미국의 양립불가능한 목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대표되는 미국의 안보협력 약속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대표되는 무역협정을 바꾸려고 시도중이다. 현 체제는 미국의 이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이 기타 나라들과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면 미국은 수십년간 NATO의 유지비용과 무역적자를 감수하면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온라인 금융전문 매체 '제로헷지'는 23일 "미국은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미국은 제국"이라며 "미국의 군사적 패권은 달러 패권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지속적인 무역적자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군사 패권과 달러 패권, 무역적자는 미 제국을 완성하는 3가지 구성요소"라며 "그중 어느 한 요소를 제거하면 나머지 두 요소도 무너진다. 결국 미 제국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제로헷지에 따르면 세계 경제의 뒷무대에서 미국이 벌여 온 은밀한 전쟁을 기록한 책 '경제 저격수의 고백'(Confessions of an Economic Hit Man)을 쓴 존 퍼킨스는 미국에 대해 '진정한 글로벌 무대에 등장한 첫번째 제국이며 직접적인 군사적 타격이 아니라 간접적인 경제적 위협에 기초한 첫번째 제국'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모든 제국은 기초구조에서 서로 닮았다. 로마제국 등 미국 이전의 제국들은 최소한 초기에는 국민의 삶을 개선시켰다.
제국의 공통점은 첫째 제국의 군대는 내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외국의 침범에 단호히 대처한다. 둘째 정복당한 나라는 제국의 화폐를 강제로 받아들이고 사용한다. 셋째 평화와 안정이 이뤄지고 공통의 화폐를 사용하면서 무역이 번성한다. 마지막으로 무역과 경제활동이 늘어나면서 제국은 세금과 공물을 걷어들인다. 이는 제국의 안보를 지키는 군대를 먹여살린다.
이를 미국과 비교하면 1~3번째 항목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첫째 미국의 군사적 힘은 전 세계적으로 펼쳐져 있다. 17만명의 미군이 150여개 나라에 주둔해 있다. NATO와 기타 동맹국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둘째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다. '커런시 워'(Currency Wars) 저자인 짐 리카즈에 따르면 달러의 비중은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약 60%, 전 세계 지급결제의 80%, 글로벌 원유 거래의 거의 100%를 차지한다(내일신문 2018년 7월 19일 13면 '달이 차면 이울듯이 무소불위 달러도 쇠락한다' 참고).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역과 글로벌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이 지역 안정을 이끌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미국이 주도하는 달러 중심의 경제금융 인프라가 정착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무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군대를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하는 동맹국이라 해도 직접 세금을 걷을 수 없다. 대신 달러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근동의 고대제국들이 지배하는 나라들이 공물을 진상하듯, 미국은 달러를 발행해 군대 영위에 필요한 부를 거둬들인다.
전 세계 나라들은 석유와 기타 상품을 수입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 또 경제위기에 대비해 외환보유고에 달러를 채워놓는다. 달러를 획득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상품과 서비스를 미국에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달러를 받는 것이다.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을 보면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패턴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중동에서는 석유를, 동아시아에서는 전자제품과 의류를, 아프리카에서는 광물을, 중남미에서는 열대과일을, 캐나다와 멕시코, 유럽연합(EU)에서는 자동차와 그 부품을 미국에 보내고 달러를 받는다. 이 달러는 미국 밖에서 사용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달러 시스템은 효용성을 갖고 있다. 미국은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안보와 공통의 화폐를 제공한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금융통합 플랫폼으로 성장을 일구는 전 세계 각 나라는 미국에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국가의 재무제표라 할 수 있는 '국민계정'(national accounts)의 관점에서 보면 그같은 상품과 서비스의 일방적 흐름은 '무역적자'로 정의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은 무역적자가 미국의 산업 공동화를 일으켜 수백만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파괴했다고 인식한다.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협정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이 제국으로, 세계 기축통화 발행국으로 있는 한 무역수지 균형을 이룰 수는 없다. 이같은 딜레마는 1960년대 벨기에 출신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이 처음 정립했다. 미국의 무역수지가 균형을 이룬다면 그밖의 나라들은 교환의 매개이자 경제위기의 완충재인 달러에 접근하기 어렵다. 글로벌 지급결제의 80%를 차지하는 달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다면, 국제 무역은 매우 어려워진다. 글로벌 무역이 와해된다면, 각국의 경제성장도 마찬가지로 저해된다. 결국 미국의 지속적인 무역적자로 상징되는 글로벌 공물시스템이 사라진다면, 미국 역시 군사적 패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적자 등 부정적 측면은 버리고 군사적 패권, 달러의 기축통화 등 긍정적 측면만 유지하려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제국을 구성하는 3개의 요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전 세계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아들이면서 미국으로 각종 공물을 보낸다. 이런 공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무역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나라들은 트럼프의 양립불가능한 목표가 글로벌 무역과 경제성장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국제적 지급결제 수단과 외환 완충재라는 달러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자국의 위안화를 국제적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고심중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트리핀 딜레마'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위안화를 기축통화로까지 발전시키는 건 주저하고 있다. 앞서의 짐 리카즈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러시아, 이란 등과 연합해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분산원장에 각 거래를 기록한 뒤 각 분기말 때 거래 순증감을 따져 금으로 상계하는 방법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IMF 역시 특별인출권(SDR)을 암호화폐 버전으로 개발해 국제 무역의 거래와 기록, 지급과 결제 등에 쓰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그같은 논의가 현실화되면 그간 달러가 행사했던 무소불위 권력은 타격을 입는다. 달러를 대량 축적하고 있는 외국 입장에서 달러를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그 유용성이 떨어지면 더 이상 축적할 이유가 없다. 금이나 SDR을 사기 위해 달러를 내다 판다면, 달러의 가치는 다른 나라 통화 대비 급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명목가치를 빠르게 상실하는 달러를 다른 나라들이 지급결제 수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미국 행정부는 더 이상 군사적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 이에 따른 경제적, 지정학적 혼란은 의심할 바 없이 세계 무역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글로벌 번영, 안보 등도 위협하게 된다.
물론 긍정적 측면도 있다. 미국의 무역수지는 균형을 되찾게 될 것이다. 미국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상품을 만들어 해외의 바이어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반면 새롭게 평가절하된 달러를 받고 미국에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려는 나라는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