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진짜 졸업은 2060년

그리스는 버텨낼 수 있을까

2018-08-21 11:20:24 게재

독일 주간지 슈피겔 진단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최근호에 따르면 그리스 작은 마을 케라소초리의 한 학교는 재난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폐허다. 교실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흑칠판, 수학책, 책상과 걸상, 운동기구, 벽에 붙은 그리스 전도. 출석부도 한쪽 귀퉁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수북이 쌓인 케케묵은 먼지가 모든 것을 감싸고 있다. 한때 약 20명의 소년 소녀들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12년 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 마을엔 학교를 다닐 만한 나이의 아이를 둔 가정이 없었다.

34살 콘스탄티나 칼리는 자신이 다니던 교실의 문을 열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칼리는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마을은 계속 쪼그라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마을의 희망이다. 세살배기 딸을 뒀고, 현재 임신 6개월째다. 출산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근처에 병원이 없다. 수도 아테네로 갈 수밖에 없다. 차를 타고 굽이굽이 길을 5시간 가야 한다. 마을엔 어린이집도 없다. 학교를 보내려면 인근 마을로 가야 한다. 그곳 역시 아이들이 줄어 학교가 계속 운영될지 불확실하다.

칼리는 마을의 최대 고용주인 지자체 소속 공무원이다. 지자체라고 해야 시장, 신부이자 경찰관, 그리고 칼리 3명뿐이다. 마을엔 100여명이 산다. 대부분이 고령의 은퇴자다. 1인당 평균 소득은 월 300유로(약 38만원)다. 일자리가 거의 없다. 주요 소득원은 양봉과 삼림관리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유럽의 그 어떤 도시나 마을보다 공기가 깨끗한 곳이지만 여행객의 발길은 거의 없다.

불확실한 미래

케라소초리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마을에 그 누가 투자를 할 것인가. 그리스는 20일(현지시간) 3번째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마쳤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위원회, 국제통화기금(IMF) 세 주체로 구성된 '트로이카' 채권단은 그리스에 모두 2733억유로(약 350조원)를 빌려줬다. 그리스는 다시 국제자본시장에서 스스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유럽연합(EU)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리스 부채 위기가 일시적으로나마 종료됐기 때문이다. 그리스 부채 위기는 유로화 통합체제를 붕괴 근처까지 몰고 갔다. EU를 분열시켰다. 위기를 겪은 탓에 그리스는 전혀 다른 나라로 변했다.

그리스처럼 철저히 발가벗겨진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임금과 연금은 대폭 삭감됐고, 세금은 크게 올랐다. 트로이카 채권단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대가로 가혹한 개혁 프로그램에 동의한 탓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경제성장이 전제돼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 경제는 축소되고 있다. 위기가 시작된 이래 모두 55만명의 그리스인이 나라밖으로 나갔다. 현재 인구는 1070만명이다. 케라소초리 마을처럼 정부는 세금을 걷는데 경제는 축소되고 일자리 등 미래가 불확실해지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를 등지고 있다.

그리스 국민은 행정개혁부 장관인 올가 게로바실리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 57세 여성장관인 그는 EU에 가입한 이후 그저그런 나라로 전락한 그리스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는 그리스에 만연한 파벌, 보스정치를 청산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모든 정치인이 취임한 이후 정부개혁을 다짐했지만,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 정부는 정실주의를 가리는 합법적 외피에 다름 아니었다. 파벌과 보스정치가 그리스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근원은 오스만 제국 시대로까지 거슬러 오른다. 씨족의 지도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해 그리스를 대표했는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직은 보상의 일부로 간주됐다. 공직에 필요한 자질은 업무 능력이 아니라 지도자와의 관계였다.

이제 그 전통은 무너지고 있다. 게로바실리 장관은 프랑스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정부에 새로운 토대를 세우려 한다.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공무원 인사 파일을 만들었다. 누가 어디서 일하는지,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 정리한 서류철이다. 공직 인사는 더 이상 소수의 유력 지역 정치인에게 할당된 몫이 아니다. 독립적이고 전산화된 인사관리 시스템에 따라 운영될 전망이다. 목표는 부적격, 무능력 공직자를 퇴출하기 위해서다.

무너지는 구체제

게로바실리 장관은 "이는 과거에는 없던 제도"라며 "이른바 '이중잣대'는 지나간 일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예전엔 서로 다른 법률이 한 사건에 적용될 때, 어느 것을 적용하는지는 관할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에 달렸다.

그는 "우리가 정권을 인수했을 때, 나라는 파산 상태였다"며 "이제 낡은 체제는 무너졌다. 물론 아직 새로운 체제를 세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전례없는 규모의 실험이다. 수세기 동안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정부가 이제 스스로 새로운 구조를 짜려고 노력중이다. 최악의 경제위기가 촉발제였다. 이전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민이 아닌, 스스로에게 봉사하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디지털시대를 맞아 국민에게 봉사하고, '행정간소화' '재정책임성' 등의 개념을 체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디지털, 언론부 장관인 니코스 파파스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대학 절친이다. 관가에서는 총리의 오른팔로 불린다. 시리자당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로도 거론된다. 파파스 장관은 그리스 정부의 디지털화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장관 임명 당시를 회상했다. "한 직원이 서류를 한아름 가져와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결재를 해달라기에 서명했다. 다시 그 직원은 서류를 안고 돌아갔는데, 이후 그 서류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재한 사항이 실행됐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는 "이제 그런 일은 없다. 행정 전산화로 모든 서류를 컴퓨터로 결재한다"며 "행정부를 거친 서류가 어느 실행 단계에 있는지 전부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 행정과 달리 과감한 개혁조치로도 풀리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인구와 경제 문제다.

2011년 인구총조사 결과 그리스 인구는 1110만명이었다. 2015년엔 1080만명으로 줄었다. 2050년엔 최소 830만명, 최대 1000만명일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그리스 총 인구의 21%가 65세 이상이다. 2050년엔 인구 1/3이 65세 이상이다. 인구절벽을 피할 단 한 가지 방법은 젊은이들의 해외 유출을 막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자리를 만들고 주택보급 등 삶의 질을 안정시켜 가족을 꾸리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 출산율은 가임여성 1명당 1.4명이다. EU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다. 사실 큰 폭의 경제성장이 없다면, 젊은이의 유출을 막을 방도가 없다. 현재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다.

젊은이 유출과 시장개방

2008~2018년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약 1/4이 줄었다. 물론 2000년대 초반 그리스의 경제호황이 사상누각이고, 부채에 의존한 것이라 해도 그리스 경제는 지금쯤 회복을 시작해야 할 때다.

현재 그리스 관광업이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독일경제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 경제는 연간 4~5% 성장 잠재력을 지녔다. 하지만 현실화하지 않는다. 지난해 성장률은 1.4%였다. 그리스 정부는 올해 2%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아테네대학 법학교수인 아리스티데스 핫지스는 "그리스는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성장의 열쇠"라고 말했다. 그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자유방임주의'를 소개한 책이 놀랄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책이 화두가 된 건 그리스엔 경제적 자유주의의 뿌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정당도 없다. 그리스는 전통적으로 좌파 아니면 우파의 관점에서 세상을 판단해왔다.

핫지스 교수는 "과거 수십년 동안 정부는 대다수 사업에서 실패했고, 사람들은 실패한 모든 일을 정부 탓으로 돌리는 악순환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리스 위기는 국가기관의 위기였다. 세금은 적게 걷고 지출은 많이 했다"며 "트로이카 채권단은 이를 고치기 위한 개혁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지출은 삭감됐고 세수는 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도 그리스 경제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다"며 "경제적 자유를 재는 모든 지표를 보면, 그리스는 경제자유도에서 한참 뒤처진 국가"라고 덧붙였다.

그는 "세금을 걷는 건 쉽다. 증세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며 "하지만 영향력 큰 이익집단의 특권을 박탈하는 건 어렵다. 특권 철폐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리스 경제는 회복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금융위기 전 그리스 노동시장은 EU에서 가장 경직된 곳으로 꼽혔다. 트로이카 채권단이 주문한 혹독한 개혁조치 이후, 그리스는 규제가 가장 적은 나라로 변모했다. 하지만 모든 예상과 달리, 실업률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고용을 창출하게 될 새로운 기업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회사설립 요건이 복잡한 데다 주요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배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혜택을 입는 건 기득권을 보호받는 소수의 대기업이다. 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는 사라진다.

성공 스토리

하지만 성공 스토리도 있다. 트로이카 채권단이 내건 구제금융 조건에 따라 그리스 정부는 철저한 민영화를 단행했다. 이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이슈가 되기도 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항공사업 운영기업인 '프라포트'가 그리스 14개 공항의 운영권을 인수하자 그리스의 한 유력 노조 지도자는 "독일 기업은 정복자이지 투자자가 아니다"라고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다.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국영자산을 매각한다는 당초의 계획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산매각 목표액은 500억유로지만 현재까지의 실적은 80억유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각된 부문은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그리스의 철도승객, 화물 운영권을 인수한 이탈리아 국영철도기업은 아테네~테살로니키 구간에 고속철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완공되면 여행시간이 3시간 반으로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중국 컨소시엄이 인수한 피레우스 항구는 화물 입항, 출항 규모를 인수 전 대비 4배 이상 높였다. 독일 프라포트가 공항 운영권을 인수한 이후 관광 부문 활기가 도드라지고 있다.

과거 그리스 부채 위기는 EU를 나락에 빠뜨릴 것처럼 보였다. 유럽 통합이 진전되는 현재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치명적 피해를 안길 수 있는 사안이다. 그리스는 2060년까지 매년 재정흑자를 달성해야 하고 흑자의 상당 몫을 부채 상환에 써야 한다. 구제금융의 혹독한 조건이다. 이는 경제성장세가 탄탄한 나라들도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리스가 매년 조건을 만족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인구와 경제발전은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소아병원이 없거나 학교가 폐쇄된 마을에 젊은 가족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스에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230개 정도 된다. 아름다운 해변과 상쾌한 공기를 자랑하는 섬이라도, 마을이 늙어가고 정부의 인프라 투자가 끊기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케라소초리 마을은 올 11월 한 아이의 고향이 된다. 엄마인 칼리는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는 어르신들이 세살배기 딸아이를 돌봐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세상살이란 맘 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을에서 유일한 젊은 엄마인 칼리는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 묻는다고 한다.

슈피겔은 "11월 태어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학교에 다니고 사춘기를 겪고 언젠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며 "그 아이가 42세 중년여성이 됐을 때 만약 EU와 유로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리고 정부가 구제금융 조건을 해마다 충족시킨다면, 그리스는 지긋지긋한 빚을 굴레를 벗고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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