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빅데이터 시대, 가방끈 짧으면 '금융 호갱' 된다

2018-09-04 11:21:12 게재

지난달 23~25일(현지시간) 전 세계 중앙은행 관계자와 석학들이 미국 와이오밍 잭슨홀에 모여 경제정책 심포지엄을 열었다. '잭슨홀 미팅'에 전 세계 시선이 쏠린 이유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금리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연구보고서가 발표됐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 앙투아네트 스쿠아 교수의 '시장구조 변화와 통화정책 대응' 연구보고서였다. 스쿠아 교수의 발표 골자는 핀테크 기업들이 당초 예상과 달리 시장에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보다 기존 거대 사업자의 독점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발달하면서 금융문맹을 노리는 은행들의 구태가 더욱 노골화, 정교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장구조 변화에서 핀테크의 역할

새로운 핀테크 기업들의 등장은 경쟁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렀다. 지난 10년 간 투자자들은 핀테크 기업에 많은 자본을 투입했다. 투자정보업체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벤처캐피털들은 지난 3년간 한해 평균 60억달러를 넘는 자본을 핀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온라인 전자결제서비스 기업 '페이팔'이나 '스퀘어', 모바일 결제서비스 기업 '스트라이프' 등은 많은 소비자를 거느린 대안적 금융서비스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지급결제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이 핀테크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한 방법은 상장을 통한 '기업공개'(IPO)가 아니었다. 이는 기존 시장을 뒤흔들 진짜 새로운 경쟁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핀테크 기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 95% 이상이 기업공개보다는 '거대기업으로의 인수'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했다. 핀테크 스타트업 인수를 주도한 것은 월가의 거대 상업은행들이나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공룡 기술기업들이었다.

게다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무담보 온라인 대출 시장을 개척한 P2P기업 '온덱'처럼 기업공개를 선택한 기업조차 공룡은행인 JP모간체이스와 합작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장 확대 여력을 확보해 가격경쟁력을 갖춘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온덱이나 '프라스퍼', '렌딩클럽' 등 일류 핀테크 기업의 관련 부문 시장점유율은 미국 공룡은행 비중에 비하면 여전히 새발의 피다. 이같은 흐름은 홀로서기를 원하는 새로운 핀테크 기업들이 기존 공룡 은행들의 프랜차이즈와 고객 베이스에 막혀 제대로 경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JP모간체이스나 씨티그룹, 골드만삭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이 인공지능(AI), 기계자율학습, 빅데이터 등에 투자하는 금액은 다른 모든 은행들을 압도한다. 스쿠아 교수는 "핀테크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금융 부문의 기업집중도를 더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며 "소수의 공룡 은행들이 정보축적 측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핀테크와 금융서비스 비용

앞서와 같이 시장구조에 대한 핀테크 기업의 영향력은 여전히 초기단계지만, 새로운 핀테크 기술은 금융상품 가격 책정 전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AI와 빅데이터 등 새로운 분석 도구를 통해 개별소비자에 대한 정교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금융서비스 가격은 개인화, 차별화되고 있다.


금융서비스 제공업체들은 고객의 신용리스크뿐 아니라 잠재적 수요가 뭔지, 금융지식은 얼마나 갖췄는지 등에 대한 정보도 사전에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은행들이 목표 고객의 행동양식, 금융 세부정보에 대한 무관심을 활용해 고도로 차별화된 가격을 책정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 행동경제학의 수많은 논문들에 따르면 개인고객은 점차 복잡해지는 금융서비스 계약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신용대출 할부를 갚아나가는 것과 관련해 자기조절 능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경쟁시장에 놓인 신용제공업체들이 목표 고객들의 행동 경향이나 금융소양 부족 등을 활용해 보다 복잡한 계약, 실제 비용을 감추는 계약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조절 능력이 취약한 개인이나 가계는 금융업체의 '호갱'이 되는 것이다.

스쿠아 교수는 "금융서비스 회사들의 고객파악 능력이 커지면서 일부 고객들로부터 더 많은 지대를 착취하고 있다"며 "분배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연준 통화정책의 변화에 따른 추가비용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비율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사례가 두드러진 부문은 신용카드 시장이다. 신용카드 발급회사들은 고객을 늘리기 위해 차별화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스쿠아 교수가 미국 신용카드 대출시장 정보제공업체인 '콤프리미디어'의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금융지식이 부족한 고객들에게는 제공되는 신용카드 유형은 각종 수수료를 후불로 내거나 수수료 조항이 애매해 즉각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제공받는 신용카드는 후불 성격의 연체 수수료나 한도초과 수수료가 높은 반면 선불 성격의 연회비는 없거나 낮았다.

반면 금융소양이 높은 고객들은 비용을 사전에 확정해 미리 내거나 수수료 조항이 명시적인 유형의 신용카드를 제안받았다. 이들이 쓰는 신용카드는 연회비가 있는 반면 연체료와 한도초과 비용이 적었다.

통화정책의 변화와 가격 정책

다양한 가격 책정이 통화정책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었다. 은행의 이자비용인 연방기금금리가 오를 때 금융소양이 적은 고객들의 신용카드의 경우 연체 수수료와 한도초과 수수료가 덩달아 올랐다. 이는 은행들이 후불 성격의 카드, 연방기금금리와 각종 수수료를 연계한다는 조항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카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반면 금융 소양이 높은 고객들에게 제공되는 신용카드는 연방기금금리가 오르면 연회비가 오르는 반면 연체료와 한도초과 비용이 낮아지는 특성을 지녔다.

스쿠아 교수는 "고등교육을 받고 금융소양이 높은 고객들은 투명하고 사전에 비용이 지불되는 계약을 맺는다. 그 결과 대출과 소비 행태를 그에 따라 조정가능하다"며 "반면 금융소양이 적은 고객들은 특히 연방기금금리가 오를 경우 연체료와 다른 후불제 수수료 등이 증가한다. 이는 결국 은행들이 이들에게 자신의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차별적 가격 책정 전략은 쓰는 은행들도 리스크가 커진다. 상황이 악화돼 고객들의 대출상환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준의 정보력이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스쿠아 교수는 "역사적으로 연준이 시장의 상태에 대해 가장 정확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며 "하지만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시장의 역동성을 만들어냈고, 연준 이외의 많은 금융기관들이 중앙은행보다 종합적이고 정확하며 적절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구글이나 아마존과 같은 회사들은 자신이 축적한 자료를 통해 지역매출 성장이나 대량의 실직 사태를 예상할 수 있다. 구글트렌드는 개인의 검색정보를 축적할 경우 얼마나 가공할 수준의 자료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도전과제를 제시한다. 스쿠아 교수는 "연준이 민간섹터 기관이 핵심 사업의 일부로 수집하는 자료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더불어 개인의 구매 이력이나 대출결정 등 고도로 세분화된 자료에 기반해 경제모델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물론 거시경제학 전반에 대한 도전과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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