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③

군국기무처 일원으로 갑오개혁의 기초를 닦다

2019-04-29 11:07:28 게재

신분제도 개혁 등 역할 … 민씨세력·대원군 사이에서 소장개화파 입지 줄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안동부사로 밀려났던 김가진은 다시 주일공사로 재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김가진이 민씨 세력의 견제로 할 일 없는 부호군 자리로 밀려나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유길준도 7년 간의 유폐에서 풀려나 1893년 겨울 경부터 김가진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잦은 접촉은 민씨 세력에 의해 소외되었던 소장개화파들이 갑오개혁 이전에 물밑에서 느슨한 집단을 형성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는 정부와 교섭해 '관민공동회'로 개편하고자 했다. 김가진은 정부측 원임대신으로 관민공동회에 참여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청과 일본은 자국민과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천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각각 군대를 파병했다.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외세 개입으로 뜻밖의 상황이 조성되자 북진을 멈추고 양력 6월 11일 일단 정부군과 전주에서 화약을 맺었다. 일본은 출병 원인이 사라졌음에도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민씨 정권을 무너뜨린 뒤 대원군을 앞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참담한 상황에 김가진이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궁궐로 들어가보니 텅빈 궁궐 안에는 문무백관들이 도망갈 때 벗어놓은 관복만 즐비했다고 한다. 일본군으로 가득찬 경복궁에서 고종과 왕세자(순종) 부자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내시 한 명뿐이었다. 김가진의 행장에 따르면 "(김가진은) 대담히 단신으로 직접 일 장교와 담판하는 동시에 항의를 하여 마침내 일병을 퇴궐케 하고 문무백관을 소집"했다. 김가진은 고종에게 대원군을 내세워 내정개혁을 실시할 것을 수습책으로 건의했다.

대원군과 사이가 틀어질대로 틀어져있던 고종은 평소에 총애하던 김가진의 진의를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갑오개혁의 추진기구인 군국기무처는 이렇게 설치된 것이다. 김가진은 유길준 안경수 김학우 조희연 권형진 등과 함께 군국기무처 회의원 17인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김가진의 '행장'은 이때의 일을 "경회루에서 17주야를 불면불휴로 208조의 개혁안을 친자(親自) 기초하여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공포 시행케 하였던 것이 저 유명한 갑오경장이며 주창자가 선생이었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

군국기무처 회의 그림│김가진은 갑오개혁의 추진기구였던 군국기무처 17인 회의원으로 참여해 208개조 개혁안을 만들었다.


군국기무처가 공포한 개혁안 208개조 중에서 김가진이 친히 기초한 것이 몇 건이나 되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 신분제도 개혁에서 신분차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김가진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암살위협에 시달린 소장개화파

갑오개혁에는 개혁파가 오랫동안 추구한 과제들과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개혁이란 것이 일본군이 대궐을 점령한 상태에서 추진되었기에 개혁의 독자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김가진 등 소장개화파가 직면한 최대 문제는 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개화파 소장관료들은 민씨 정권의 타도를 위해 대원군과 손잡았지만, 군국기무처가 실권을 장악하고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하자 대원군이 반발했다. 대원군과 개화파와의 대립은 10월 31일 법무협판 김학우의 암살로 한층 격화되었다. 김학우는 대원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등 '개화당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곤 했다. 실제로 이듬해인 1895년 이준용 일파의 역모사건이 적발되었을 때, 이들은 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유길준 등 군국기무처 핵심인물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김가진을 비롯하여 안경수 조희연 권형진 등은 흔히 '일본당'이라 불렸지만, 일본은 그들을 불신했다. 일본은 이들이 교활하거나 도량이 좁고 우매하다면서 "이들의 주요관심은 개혁과 새로운 제도 창설보다는 오히려 이번 사변에 편승하여 개혁파로 가장하고 높은 벼슬을 노리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적 본성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일본 앞잡이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사리사욕이나 승진만을 추구하는 모리배도 아니었다. 이들은 조선의 문벌사회에서 능력은 출중하고 신문물에 정통하지만 신분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는 근왕파 개혁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황제의 실제권력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일본식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지만, 대원군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고종 쪽으로 기울어 군주주도형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기세를 올렸지만, 그 기세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꺾여버렸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이 틈을 타 미국을 비롯한 구미열강과의 관계개선에 힘썼다. 이 무렵 김가진은 정동파라 불리는 친미적 성향의 관료군과 함께 움직였다. 주한 일본외교관들은 "이들 '영어파'는 일본배척파라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일본은 김가진을 일본당이 아니라 일본배척파, 영어파로 보았지만 그렇다고 미국 외교관들도 김가진을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새비지-랜도어 같이 특별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은 김가진을 탁월한 외교관으로 평가했지만, '돈귀신(mammon)'이라는 오명을 얻은 미국공사 알렌은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평했다. 알렌은 운산금광 이권문제를 놓고 김가진과 자주 접촉했는데 김가진이 "자기 태도를 주마다 바꾸는 진짜 변덕쟁이였기 때문에 자기와 일본은 김가진을 친구라고 부르면서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김가진이 한창 활동했던 19세기 마지막 10년과 20세기 첫 10년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무엇이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이고 무엇이 개인에게 가장 올바른 길인지 분간하기 참으로 어려웠다. 비단 김가진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때론 청과 손잡고 때론 일본과 손잡고 때론 러시아와 손잡고 때론 미국과 손잡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변경시켜야 했다. 일본은 이런 김가진을 '의지박약'에 '일정한 주의나 정견이 없는 사나이'라고 폄하했지만, 김가진에게 그것은 아찔한 줄타기였다. 김가진이 이렇게 옮아다닌 것은 일본이 비난한 것처럼 '일정한 주의나 정견이 없는 사나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외세도 조선의 이익을 자국의 이익보다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변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이 시기 지식인이나 관료들의 모색과 방황과 좌절과 결단을 평가할 때 그 끝을 중히 보아야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는 그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어떻게 선택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일본의 압력으로 구속된 '일본당'

김가진은 17주야를 경회루에 머물며 의욕적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의 동력과 방향은 대원군, 고종과 중전 민씨, 그리고 일본 등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점점 떨어져 갔다. 고종의 왕권 강화와 민씨 척족세력의 복귀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라는 파국적 상황을 낳게 되면서 김가진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1895년 10월 4일(음력 8월 16일) 김가진은 농상공부대신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직소'를 올렸다. 김가진이 내각에서 물러난 직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중전 민씨가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것이다. 고종은 사건발생 9일 후인 10월 17일 일본공사 고영희를 면직하고 김가진을 일본주차 특명전권공사로 다시 임명했다. 김가진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는 조선이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국교단절을 넘어 전쟁도 불사해야 할 그런 엄중한 때였다. 김가진이 아무리 유능한 외교관이라 해도 그가 도쿄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김가진은 도쿄로 가지 않았다.

일본에 가는 대신 김가진은 을미사변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손을 잡고 민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김가진은 1896년 1월 서재필과 함께 상무회의소의 설립을 추진했다. '상무회의소 규례'가 김가진이 농상공부대신에서 물러난 직후에 공포된 것으로 보아, 이 법안의 준비에 깊이 관여했던 것이 틀림없다. 김가진 등이 회원 40명을 모아 1896년 1월 26일 상무회의소를 설립한 것은 상업을 천시하며 양반은 상업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 온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상무회의소 설립의 또 다른 의의는 일본을 등에 업은 일본상인들의 침투에 맞서 조선상인들이 이익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김가진은 상무회의소 창립총회에서 석유직수입회사의 설립을 발의하여 참석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일본상인들이 미국 스탠다드석유회사 일본지사로부터 독점적으로 석유를 수입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직수입회사 건설을 추진한 것은 경제적인 반일운동이었다.

일본은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을 추진한 서재필과 김가진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서재필에게 직접 '암살' 운운하며 협박을 가했다. 당시는 일본 낭인배들이 왕비를 시해한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공사가 암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단순한 겁주기로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무회의소 설립 1주일 뒤 김가진은 일본의 압력을 받은 친일내각에 의해 '농상공부대신 재직시에 잦은 파티를 열면서 파티 비용 마련을 위해 공금을 유용했다'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김가진이 구속되자 상무회의소에 가입한 조선 상인들이 일본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상무회의소를 탈퇴했고, 석유직수입회사를 설립하려던 김가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억울하게 구속된 김가진은 오래 갇혀 있지는 않았다. 김가진이 구속되고 채 10일이 안된 2월 1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이 발생하였고, 친일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김가진 후임으로 농상공부대신이 된 정병하가 피살된 것이다.


만민공동회를 이끈 대신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된 뒤 김가진은 독립협회 결성에 열정을 쏟았다. 1896년 7월 2일 발족한 독립협회의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이었고 김가진은 위원 8명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김가진 외에 다른 위원 7명은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등이다.

한 나라의 왕이 외국 공관에 숨어 지낸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김가진과 안경수는 고종의 환궁을 위해 독립협회의 공개적인 요구 이외에도 다양한 비밀운동을 벌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보낸 뒤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1년 만의 환궁이었지만 정치상황은 아관파천 이전에 비해 '더 보수적, 혹은 국왕에게 전제권을 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갑오개혁 때 밀려난 김병시 정범조 등 수구파 원로들이 일선에 복귀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고종은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표방하며 일종의 입법기관으로 교전소(校典所)를 설치했다. 김가진을 비롯하여 독립협회의 주요 성원들이 교전소의 지사원으로 임명되자 보수파가 강력 반발했다. 의욕적으로 설치된 교전소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어 김가진은 5월 14일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수구파나 러시아 세력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김가진이 지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지방으로 밀려났지만 김가진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의 입장에서는 '서얼'이라는 약점을 지닌 개화파 김가진의 부임을 매우 삐딱하게 보았던 듯하다. 개화세력도 모두 김가진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당시 개화세력이 발간하던 '독립신문'은 김가진을 옹호한 반면, '매일신문'은 김가진을 심하게 비난했다. '매일신문'은 "외국도 많이 다닌 '참 개화당' 김가진이 감사로 온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김가진의 도임을 기다렸으나, 김가진이 백성들을 하도 못살게 굴어 개화를 원수같이 여기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김가진을 "나라를 아무쪼록 붙들어 보전하여 가려고 밤낮으로 주의하는 개화당을 방해하는 마귀"라고 극언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개화파 내부에서도 김가진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김가진은 1년여의 황해도관찰사 생활을 마치고 1898년 여름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독립협회가 민중계몽단체에서 직접적인 정치단체로 발전하여 만민공동회를 여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부와 교섭하여 백성들만 참여하던 만민공동회를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로 개편하고자 했다. 김가진은 원임대신 자격으로 의정부 참정 박정양, 법부대신 서정순, 농상공부대신 김명규(金明圭), 탁지부대신 고영희, 중추원의장 한규설 등과 함께 관민공동회에 참가했다. 백정 출신 인사가 개막연설을 하며 시작된 관민공동회는 유명한 '헌의 6조'를 채택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대신들도 모두 '헌의 6조'에 서명했다. '헌의 6조'는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1조에 포함하고 있었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고종과 수구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고종은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주요 간부 17명을 구속했고,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은 모두 해임되었다. 정권은 다시 수구파들에게 넘어갔다.

대중들은 이와 같은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민들은 경무청 앞으로 몰려가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민공동회를 연일 계속했다. 결국 고종은 구속된 17인을 석방하고 독립협회를 무고했던 수구파 대신들을 해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민공동회는 고종에게 만민공동회의 탄압에 앞장 선 '5흉'의 처벌과 '헌의 6조'의 실시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 이 중 만민공동회 11일차인 11월 15일 4차 상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상소문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소두(疏頭)는 다름 아닌 김가진이었다. 당시는 수구파가 보부상인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지도자들의 암살을 대놓고 떠들어 대고 있을 때였다.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공공연히 "김가진 김종한 고영근 윤치호 4명을 쳐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고 한다.

김가진을 소두로 한 4차 상소 4일 후인 1898년 11월 19일 길영수 홍종우 등이 이끄는 보부상 2000여 명은 인화문 앞에서 열리고 있는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고종은 결국 12월 22일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탄압했고 25일에는 황제의 조칙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처음에는 충군한다 애국한다 하며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폐륜하고 난국한다"며 해산을 명했다. 당시 대신급 인사로서는 유일하게 만민공동회의 '소수'로 나섰던 김가진의 독립협회 활동도 이로써 종언을 고했다.

독립협회에서의 김가진 활동과 관련하여 1가지 규명되어야 할 사실은 독립문의 제자(題字)를 누가 썼는가 하는 문제이다. 독립문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독립문의 제자를 쓴 사람에 대한 문헌자료로는 독립문 건립 이후 25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에 나온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기사가 유일하다. 이 기사에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라고 되어있다.

독립문 현판 글씨. 동아일보는 이완용 글씨라고 보도했고, 동농 집안에서는 김가진 글씨로 보고 있다. 당시 이완용은 독립협회 위원장이었고, 김가진 또한 핵심간부였기 때문에 둘 다 글씨를 쓸만한 위치에 있었다. 서예감정가 김선원씨는 "동농 글씨"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런데 김가진 집안에는 이 글씨를 김가진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김가진의 며느리인 정정화의 '장강일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완용도 비록 매국노의 오명을 남겼지만, 독립협회의 위원장이었고 당대에 글씨로도 이름을 떨쳤고, 김가진 역시 독립협회의 핵심간부이자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다 독립문을 세울 때 제자를 쓸 만한 위치에 있었다.

독립문의 제자가 한글과 한문을 합쳐 여섯 글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글씨체로써 감정하는 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TV 진품명품'에서 서예 감정을 맡았던 서예가 김선원 선생은 "서예 전문가나 정통한 감정가라면 한눈에 알 수 있는 문제"라면서 "송대의 명필 미불 서체의 영향을 받은 김가진의 글씨가 분명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앞으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