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없는 재정실험, 연착륙할까 경착륙할까

2019-04-30 11:48:34 게재

"균형재정, 이제 '구시대 유물' 됐나" 에서 이어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공화당이 재정완화정책에 적극 나서면서 민주당 내 재정확대 논쟁도 가열되고 있다. 민주당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하던 2000년을 전후해 잠깐이나마 재정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 민주당 내 진보파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일부 의원들은 잠재적으로 적자를 크게 늘릴 수 있는 대규모 재정 지출안을 꺼내들고 있다. 기후변화 대처와 사회적 우선순위 정책 수립을 위해서다.

대표적 사례는 뉴욕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과 매사추세츠 에드 마키 상원의원이 밀어붙이는 '그린뉴딜' 정책이다. 신재생 클린에너지 부문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투자하자는 내용이다. '전 국민 의료보장'(Medicare for all) 프로그램도 있다. 버니 샌더스 의원을 포함해 민주당 내 예비 대선후보들이 너나없이 지지하는 정책이다.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진보파의 리더격인 로 칸나 하원의원은 "민주당이 재정적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긴축재정 정책은 잘못됐다"며 "현 시대의 우선순위 정책은 부자증세가 아니라 의료보험과 교육,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내 한 선거 전략가는 2020년 대선 잠룡들을 평가하며 "민주당 대선경선의 승리 공식은 재정정책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극단적 입장에 서야 최종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막대한 적자와 부채경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채와 적자로 인한 위협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도대체 '구축효과'(crowding out)는 어디에 있나, 인플레이션과 치솟는 금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반문했다. 구축효과란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세금을 걷지 않고 국채를 발행해 지출을 늘리면 민간에서 빌릴 수 있는 자금이 줄어들어 이자율이 상승한다는 개념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통화주의는 재정정책보다 통화정책을 우선하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최근 재정완화 정책에 대한 워싱턴 정가의 새로운 사고는 통화주의 사상을 뒤집는 것이다. 올해 1월 전미경제학회(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주제연설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이제는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에 더 큰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블랑샤르는 "금리가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연 성장률보다 낮은 상태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블랑샤르는 "경제 성장률이 장기의 무위험 국채 금리보다 높아지는 시기로 전환되고 있다"며 "이는 각 나라가 더 많은 빚을 지고도 이자를 지급하는 능력, 상환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는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빚을 낼 능력이 있다면, 이는 정부에게 수지 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속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경제학계도 '금리가 제로 상황으로 수렴하면서 통화정책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기에 경제의 수요를 견인하는 역할은 이제 재정정책이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럽중앙은행(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 각국 정부가 더 큰 역할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통화정책은 이미 매우 완화적인데, 필요하다면 더욱 돈을 풀 수도 있다"며 "하지만 우리는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에 이르렀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상당수 경제학자는 유럽연합 위원회(EC)가 지나치게 가혹한 재정정책을 쓰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제금융협회(IIF)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빈 브룩스는 "이탈리아처럼 규모가 큰 주요 경제국이 사실상 영구적 정체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지지받기 힘들다"며 "유럽연합이 유로존 주변부 국가들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긴축재정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탈리아 정부 역시 EC의 정책을 비판하며 신속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재정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는 '현대통화이론'(MMT)이다. 자국 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들은 완전 고용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부채를 얼마든 떠안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버니 샌더스 의원의 경제자문인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 스테파니 켈튼 교수 등이 제안한 이론으로, '경제침체 또는 통화정책이 경제부양의 힘을 잃었을 경우 정부의 적자지출을 옹호하는' 케인스학파의 주장을 훨씬 뛰어넘는다.

MMT 이론가들은 정부는 평상시 재정정책 결정과 관련해 증세 또는 지출삭감 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인플레이션 폭등이 문제가 된다면, 그때 가서 세금을 올려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켈튼 교수는 FT 인터뷰에서 "미국 정치인들은 지출안을 세운 뒤 의회 예산처에 들고가 균형재정 원칙에 맞는지 물어보곤 한다"며 "하지만 지금은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예산안을 허락받기 위해 기다릴 때가 아니다. 신발 끈을 묶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달릴 수 없다'고만 불평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물론 재정건전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자포자기한 건 아니다.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최근 IMF 연차 총회에서 '금리와 인플레이션이 장기간 낮은 상태로 지속돼 빚내기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MMT 정책의 금융 조달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로고프 교수는 "현재 금리가 낮기 때문에 보다 많은 빚을 질 수 있다는 건 사실일지 모른다"며 "하지만 MMT 이론에서 말하는 빚은 초단기간을 가정하기 때문에 이자가 싼 것이다. 금리가 오르기 전까지만 저렴하다.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보코니대의 프란세스코 지아바치 교수는 "재정적자를 강하게 억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해도 세율이 낮다면 경제성장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재정 씀씀이를 줄인 나라에서는 긴축정책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며 "2010~2014년 아일랜드와 영국, 1980년대 덴마크가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는 세율을 올렸기 때문에 경제가 추락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MMT를 포함해 재정정책을 능동적으로 구사하자는 주장들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주류 경제학은 인플레이션 급등과 같은 문제를 촉발하지 않고 돈을 찍어낼 수 있다는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로렌스 서머스 교수는 "'공짜점심이 가능하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며 "공급주도 경제이론가들이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면 그만큼 낙수효과가 발생한다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이론"이라고 지적했다. 미 연방준비제도 제롬 파월 의장도 MMT 이론에 대해 "그냥 틀린 이론"이라고 평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존 르웰린은 "MMT 옹호자들은 종종 자신의 이론으로 세상을 구할 것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애매한 구석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MMT 이론은 △경제가 완전고용과 거리가 멀다든지 △디플레이션 압력이 명백하다든지 △제로금리제약 상황이 온다든지 등 예외적인 환경에서 적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진보파 의원들도 MMT 이론을 옹호하지만 '재정에 무책임하다'는 낙인만은 피하려 한다. 경제적 불평등을 고치는 재원으로 부자 증세를 강조한다. 샌더스 의원은 최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공부채 급등에 대한 우려는 합리적"이라며 "우리는 국가의 의료보장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에 마땅히 돈을 지불할 것이다. 미국의 현 대통령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FT는 "문제는 워싱턴 정치인 중 공공부채 급증을 막을 현실적 대안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라며 "차기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 미국은 향후 10여년 동안 거대한 재정정책 실험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매체는 "전 세계는 공공부채가 치솟는 상황이 별 문제 없는 현상으로 끝날지, 아니면 경제·금융의 골칫거리가 될지 지켜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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