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에 개인정보 넘겨도 '왜 제공했는지는 몰라도 돼'

2019-11-01 10:57:49 게재

대법원 "통신사, 공개의무 없어" 판결 … 법조계 "개인정보 지나치게 협소 해석"

수사기관 등에게 개인 통신자료를 제공한 통신사들에게 해당 개인이 통신자료제공요청서 공개를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공개의무가 없다"고 봤다. 통신자료 제공사실을 개인이 통보받지만 정작 중요한 '왜 제공한 것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제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10월 31일 정 모씨가 SK텔레콤 주식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통신자료제공요청서공개청구 소송'에서 원고청구를 기각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같은 취지로 LG유플러스에 대해 제기된 소송도 원고 패소 판결했다. 소송을 맡은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통신사에 공개하라고 요구하면 자료제공요청서 일부만 공개할 뿐이고, 수사기관은 수사상 기밀이라고 공개하지 않는다"며 "(개인) 통신자료를 가져갔는데 대체 왜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와 진보네트워크, 인권운동사랑방 등은 지난 2016년 3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무단 수집과 관련한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 참여연대 제공


◆제공사실보다 제공이유 더 중요 = SK텔레콤을 이용했던 정씨는 2016년 3월 SK텔레콤에 자신의 통신자료를 제3자에게 제공한 사실이 있는지 알려줄 것을 요청했고, SK텔레콤은 2015년 6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총 7건의 통신자료 제공이 있었다고 회신했다.

정씨는 "정통망법에 따라 통신자료제공요청서를 원고에게 공개할 의무가 있다"며 SK텔레콤을 상대로 통신자료제공요청서 공개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통신자료제공요청서는 수사기관 등이 재판, 수사 등을 위해 필요한 이용자 개인정보를 확보하지 못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해당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내지 통신자료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류다.

1심은 통신자료제공요청서가 정통망법상 개인정보가 아니고, 열람·제공요구권의 대상이 아니라며 정씨 주장을 배척했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도 정씨 항소를 기각했다. 핵심은 전기통신사업법상 통신자료제공요청서가 정통망법상 개인정보인지 여부였다. 정통망법상 개인정보란 성명·주민등록번호 등에 의해 특정한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부호·문자·음성·음향 및 영상 등의 정보를 말한다. 해당 정보만으로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어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해 알아볼 수 있는 정보도 개인정보에 포함된다.

◆"통신자료요청서 개인정보 아냐" = 항소심 재판부는 통신자료제공요청서가 정통망법상 개인정보가 아니라고 봤다. 통신자료제공요청서 자체가 특정한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아니고, 통신자료제공요청서에 기재된 통신자료 요청사유, 해당이용자와 연관성, 필요한 자료 범위에 정통망법상 개인정보가 담겨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 판단이다.

재판부는 정씨에게 통신자료제공요청서 공개를 청구할 권리가 없다고 봤다. 정통망법은 이용자에게 열람·제공 요구권이 인정되는 대상의 하나로 '이용자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한 현황'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자료제공요청서는 수사나 재판 기관이 필요한 이용자 개인정보 내지 통신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서류인 점 등을 감안하면 열람·제공요구권이 인정되는 이용자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한 현황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SK텔레콤이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통신자료제공요청서를 공개할 의무가 있다는 원고의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통신자료제공요청서 등이 개인정보보호법에 규정된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정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용자, 왜 줬는지 알권리 있어" = 대법원도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다"며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이 '개인정보'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봤다는 법조계 의견이 일었다.

사건을 담당한 양 변호사는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과 헌법소원 등을 계획하고 있다.

양 변호사는 내일신문과 통화에서 "통신자료제공내역을 공개하라고 할 때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왜 제공했는지 여부가 핵심"이라며 "대법원 판결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제공했는지는 알려주겠지만 이유는 몰라도 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 변호사는 현재 KT를 상대로 비슷한 소송을 진행중이다. 1심에서 승소한 후 항소심 중인데 대법원 판결로 패소 가능성이 커졌다.

이충윤 변호사(법무법인 해율)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들이 이용자 개인정보를 이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한 현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규정을 상당히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라며 "최소한 해당 요청서 중 요청사유와 요청한 정보의 범위 등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용자에게 열람제공 요구권이 존재해야 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안성열 기자 son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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