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차 시대의 종언? 구글·테슬라에 왕좌 넘겨줄까

2019-11-06 11:26:30 게재

독 시사주간지 슈피겔 "내연엔진 시대 호령하던 독일차에 거대한 위협"

미국의 테슬라, 중국의 신흥 전기차업체로부터 위협받는 독일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자율주행과 전기자동차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에 존립근거를 마련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버거운 경쟁이 될 것이라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5일 분석했다. BMW와 다임러, 아우디, 폭스바겐은 지난 1세기 동안 세계의 독보적 표준이었다. 슈피겔은 "하지만 이제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지난 4일(현지시간) 독일 작센주 츠비카우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에서 전기자동차 모델 'ID.3'가 연속 생산체제(serial production)에 돌입했다.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를 호령하던 독일 자동차산업계에 새로운 역사가 쓰여진 셈. 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 시대의 시작' 또는 '한 시대의 종언'으로 볼 수 있다.

폭스바겐의 츠비카우 공장에서 이제 하루 1500대의 전기자동차가 생산된다. 매년 33만대다. 이 공장은 폭스바겐측이 '유럽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전기자동차 공장'이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ID.3의 디자이너들은 이 차를 '21세기 전기차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폭스바겐의 '비틀'이나 '골프'처럼 대표적 히트상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물론 폭스바겐만의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독일 차업계에 매우 중대한 시점이다. 츠비카우 공장에서 폭스바겐은 내연 엔진 시대의 조종을 울린 셈이다. 폭스바겐은 2040년 휘발유나 경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 엔진 자동차 생산을 완전 종료할 계획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 시대의 종언'이다.

지난 100년은 독일 자동차업계에 기념비적인 시대였다. 독일 발명가와 엔지니어, 용감한 사업가, 비전을 가진 디자이너, 능력 있고 숙련된 노동자 등이 한데 어우러져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었다. 독일 차는 전 세계 최고 품질의 장인정신을 가리키는 전형이었다. 폭스바겐과 메르세데스 벤츠, BMW, 포르쉐, 아우디와 이들이 생산하는 글로벌 고품질 자동차는 독일을 대표하는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이 만든 엔진은 정교하고 탁월했다.

BMW의 성공 기초를 닦은 에버하르트 푼 쿠겐하임, 아우디를 처음 만들고 폭스바겐을 전 세계에 일반명사로 각인시킨 페르디난트 피에히, 포르쉐의 구원투수로 등장해 상상 불가능한 차원으로 승격시킨 벤델린 비데킹은 미국 산업계로 치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제프 베이조스와 같은 인물이었다. 즉 시대의 영웅이었다.

물론 역풍과 난관도 많았다. 석유파동과 이에 따른 휘발유 가격 폭등, 도시 내 대기오염 주범, 교통정체의 원흉, 적절한 속도제한에 대한 논쟁 등이 끊임없이 일었다. 1980년대 들어서 사람들은 경제와 환경의 연관성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환경보호론을 내세운 독일 녹색당이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휘발유 가격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1세기 들어 기후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이제 많은 이들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대형 자동차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늦게 참가한 게임

하지만 독일 자동차산업계가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고 깨닫게 된 건 아주 최근이었다. 폭스바겐을 선두로 한 독일 자동차산업계는 환경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일단 더 효율적인, 매연을 덜 뿜어내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첫 번째 방법이 실패할 경우 현실을 속이거나 부인하는 것이었다.

상황의 역설이었다.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은 결국 독일 자동차산업계 전체가 현실을 수긍하고 미래를 준비하도록 채찍질했다. 지난 1세기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독일의 자신감은 심각히 훼손됐다. 독일 자동차회사의 경영진과 감독이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절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20세기 자동차산업의 리더였던 독일 기업들은 새로운 시대에 소외되고 있다는 현실적 리스크에 직면했다. 경우에 따라 독일 자동차산업은 물론 독일 전체의 미래와 번영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새롭지만 불편한 시대의 시작이다. 그동안 독일 기업들은 디젤엔진을 조작하느라, 더 큰 SUV차에 베팅하느라 바빴다. 미래의 구동축 시스템을 성의없이 연구하고 실험했다. 사력을 다해 자율주행차를 실험하기보다 그에 대한 반박자료를 모으는 데 열중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개되는 와중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구글과 테슬라, 중국의 민간 또는 정부 주도의 자동차기업이 등장해 독일의 아성이었던 기술적 탁월함을 능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가 무엇인가'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기존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최근까지 독일 제조업체들의 사고방식은 '새로운 컴퓨터 기술과 디지털 네트워크의 기본적 쓰임새는 이미 존재하는 전통 자동차를 보다 완전하게 해주는 용도'라는 것이었다. 민간 승용, 운송 목적으로 자동차를 판매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전통적 사업모델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미국의 신흥 경쟁기업들은 디지털 요소를 '새로운 이동성'이라는 컨셉트의 중심에 두면서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이들 기업에게 컴퓨터란 더 이상 요소가 아니다. 자동차의 심장이고 사업모델의 핵심이다.

테슬라는 자동차라기보다 스스로 주행하는 것을 포함해 그 어떤 놀라운 일도 척척 해내는 '고성능 컴퓨터'다. 중국 기업들은 운전에서 느끼는 즐거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승객들을 안전하고 안락하게 이동시키면서도 새롭게 조직된 도시생활에 완전히 통합되는 이동 수단을 만들어내고 있다.


충돌하는 세계

슈피겔은 최근 자동차산업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가봤다. 미국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의 테슬라 공장, 중국 베이징 남쪽에 위치한 시범도시, 독일 남부 자동차 기업들의 연구개발부서 등이다. 슈피겔은 "이를 통해 알아낸 건 놀라웠다"며 "모든 신호는 '파괴적 혁신'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파키스탄 출신의 사야드 칸(45세)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미래전략인 '케이스'(CASE, Connected, Autonomous, Shared & Service and Electric Drive : 연결 자율 공유 전기)를 담당하는 디지털·모빌리티 담당 부사장이다.

칸 부사장은 슈투트가르트 근처 진델핑엔에서 일한다. 다임러 엔지니어들의 자부심이자 벤츠 애호가들의 아이콘인 'S클래스' 를 비롯한 다임러의 차들은 1915년부터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임직원은 2만5000명을 넘는다. 독일 최대 공장이다. 칸 부사장의 임무는 다임러 경영진과 직원들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에겐 각성이 절실하다"

칸 부사장은 "개인 차원, 부서 차원, 회사 차원, 국가 차원의 각성이 필요하다"며 "자기만족에 머무른다면 앞으로 매우 힘든 시기가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 출신이지만 아내, 아이들이 태어난 독일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 그는 "내 롤모델은 전후 초대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라며 "전후 독일에 경제 기적을 일으킨 동력, 즉 정신재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칸 부사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와 중국의 신흥 경쟁자들이 다임러보다 더 빠르고 더 성공을 갈망한다는 점이 두렵다"고 토로했다. 다임러는 새롭지만 필사적인 느낌의 슬로건을 만들었다. '우리는 자동차를 개발했다. 이제 자동차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칸 부사장이 즉각 답한 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것.

다임러 CEO인 올라 칼레니우스는 몇주 전 열린 '프랑크푸르트 국제모터쇼'에서 도전적 실험을 강조했다. 그는 진델핑엔과 캘리포니아, 인도에 소재한 다임러 실험실에서 만든 시제품들을 자랑했다. '에어 택시'(air taxi)로 불리는 볼로콥터에서 순수 전지 전기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델을 보여줬다.

칸 부사장은 "연결 자율 공유 전기 등 4가지 '케이스' 주제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일해야 한다"며 "전기자동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극히 위험한 단견"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동차의 미래는 엔진뿐 아니라 △인공지능 시스템 △자율주행 △네트워킹 능력 △차량 공유 서비스 등이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임러는 지난해 연구개발 예산을 91억유로(약 11조6600억원)로 늘렸다. 하지만 진델핑엔과 슈투트가르트 공장은 여전히 연구개발 단계인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와 중국의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새롭고 차별화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슈피겔은 "독일 기업들은 그 많은 돈을 제대로 된 곳에 투입하고 있는가" 지적했다.

다임러는 '헤이 메르세데스'로 불리는 음성인식 기능을 개선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객들이 차량의 '정보오락' 시스템을 제어하는 데 사용하는 기능이다. 이는 전 세계에 걸쳐 광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임러는 한국의 현대자동차, 중국의 기술기업 2곳과 함께 미국 스타트업 '사운드하운드'에 1억달러를 투자했다. 이 기업은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곳이다. 다임러는 음성인식 서비스의 강자인 아마존의 알렉사, 구글 어시스턴트가 언젠가 가정을 넘어 결국 자동차까지 점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칸 부사장은 고객이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헤이 메르세데스'를 이용해 피자를 주문하기를 원한다. 슈피겔은 "하지만 그같은 기능이 새로운 시대의 새벽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리더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의 자율주행부문 CEO 존 크라프칙과 수백명으로 구성된 팀은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3층 연구동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건물 리셉션홀 뒤 검은 벽엔 은빛의 'X'자가 걸려 있다. 이는 알파벳이 전 세계를 상대로 도전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알파벳이 추진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쓰이는 코드명이다.

그 프로젝트 중 하나는 자율주행 부문 리더인 '웨이모'(Waymo)다. 길(Way)과 '이동성'(mobility)을 합한 말이다. 웨이모는 전 세계에서 가장 숙련된 운전 기계를 개발중이다. 크라프칙의 시각에서 이제 더 이상 인간은 없다. 카메라와 레이저 스캐너, 레이더 등으로 끊임없이 주변환경을 탐색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데이터를 운용하는 컴퓨터만 있을 뿐이다.

하얀색 자율주행 밴차량들이 구글 빌딩 밖 거리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운전석 뒤 안전요원이 타고 있지만 이들이 방향을 틀거나 제동, 기어변속을 할 필요는 없다. 컴퓨터가 실수할 때만 개입하려는 목적에서 탑승한다.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캘리포니아주 차량국 보고서에 따르면 웨이모 시스템에서 오류가 난 비율은 평균 1만8000킬로미터를 주행할 때 1번꼴이었다. 이는 뒤늦게 자율주행 실험을 수행하는 독일 자동차기업들에게는 비교불가의 충격적 숫자다.

웨이모는 지난해 111대의 자율주행 실험차를 운영했다. GM은 162대의 실험 자동차를 굴린다.

반면 BMW의 경우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현지실험을 수행하는 차는 5대에 불과하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4대다.

캘리포니아주 차량국 보고서에 따르면 웨이모의 인간 운전자는 1만8000킬로미터당 1번꼴로 개입했지만, 고작 5대에 불과한 BMW의 자율주행차는 현재까지 총 주행거리가 66킬로미터에 불과하고, 그나마 7.4킬로미터 달리다 오류가 나 사람이 개입해야 했다. 메르세데스는 더 형편없었다. 2.4킬로미터를 달리다 고장났다. BMW와 메르세데스가 따라잡아야 할 격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진짜 위협

독일 자동차업계에 유일하게 좋은 소식은 웨이모가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 계획이 없다는 점.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인 피아트 크라이슬러가 웨이모의 자율주행차를 만들었다. 웨이모는 센서와 인공지능을 달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폭스바겐과 다임러 등 독일 차업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웨이모와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이 알고리즘과 카메라, 레이저 스캐너, 기타 센서 등 각종 기술을 갖추고 자동차 자율항법의 미래를 지배한다면, 오늘날 거대 자동차 제조업체를 차량 외부와 섀시를 단순 공급하는 기업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운전하는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고 대신 로봇이 조종하는 BMW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메르세데스의 심장인 엔진이 한국산 전기구동축과 배터리로 대체된다면, 메르세데스 신화에서 남은 건 뭘까.

독일차 "'움직이는 껍질' 공급하는 업체로 전락하지 않겠다" 로 이어집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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