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DC, 은행의 돈 창출 능력 거세할까

2021-05-10 12:38:04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부분지급준비금제 위협”

중국 상하이시 한 쇼핑몰에 인민은행이 시범발행하는 디지털위안(e-CNY)을 사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부착돼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는 물리적 형태의 화폐인 현금을 디지털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고려중인 CBDC 디자인은 기존 온라인 결제 플랫폼과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CBDC는 중앙은행에 예치된 예금과 비슷한 돈이라는 점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디지털위안(e-CNY)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 정부가 제공하는 소액의 디지털화폐를 시범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5년 디지털유로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영국 재무부와 영국중앙은행은 지난달 19일 CBDC 발행 여부를 검토할 태스크포스팀을 발족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역시 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전세계 상당수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CBDC를 연구하거나 실험하고 있다. 빠르면 3년 내 전세계 인구 1/5을 차지하는 국가들이 CBDC를 발행한다.

당초 일반인과 중앙은행을 잇는 CBDC 개념은 소수 경제학자들의 영역이었다. 흥미롭긴 하지만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프랑스중앙은행 부총재를 지낸 장-피에르 랑도는 이코노미스트에 “하지만 2년 만에 대중과 금융당국이 돈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이같은 급변을 초래한 건 페이스북이 제안한 디지털화폐 ‘리브라’였다”고 지적했다. 리브라는 2019년 6월 페이스북이 출시하겠다고 밝힌 디지털화폐와 결제네트워크다. 페이스북은 주요국 통화 바스켓으로 디지털화폐를 보증한다고 밝혔다. 랑도 전 부총재는 “리브라의 개념은 국제 통화당국 대부분에 큰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디지털화폐, 금융권에 충격 안겨

지난 2세기 동안 대부분의 통화시스템은 ‘최종대부자’ 모델에 의존했다. 상환능력이 있는 금융기관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보증하는 기구가 개입할 수 있게 한 형태다. 이것의 현대적인 형태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현금과 ‘지급준비금’(은행이 예금자들의 인출 요구에 대비해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예치해야 하는 예금의 일정비율액) 형태로 경제에 유동성을 제공한다. 이같은 금융시스템에서 민간의 역할은 은행이 맡는다. 은행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하면서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은 예금의 일부분만을 보유하고 나머지는 시중에 대출하면서 새로운 돈을 유통시킨다. ‘부분지급준비금제’(fractional reserve banking)다. 결국 대부분의 돈은 사실상 은행들이 만들어낸다. 미국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광의의 통화 비중은 지난 100년 동안 거의 동일하다. 광의의 통화 약 90%는 상업은행 예금이다. 다른 나라에서 그 비중은 더 높다. 유로존은 91%, 일본은 93%, 영국은 97%다.

부분지급준비금제 시스템엔 결함이 있다. 은행 입장에서 대출은 장기 비유동성 자산인 반면 예금은 단기 유동성 부채다. 따라서 은행들은 위기가 닥칠 때 이를 막아줄 최종대부자가 필요하다. 바로 중앙은행이다.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우려가 생긴다. 은행들의 도덕적해이 가능성이다. 뒷배가 든든하다고 여긴 은행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더 많이 대출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리려 할 수 있다.

거대한 사용자 네트워크를 보유한 페이스북은 이 프로세스를 위협했다. 잠재적으로 전세계 20억명 이상이 새로운 디지털통화를 사용할 수 있다. 페이스북 네트워크는 국경을 넘나든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생긴다. 당연히 각국은 리브라를 반대했다.

거센 반발에 부닥친 페이스북은 현재 리브라 대신 ‘디엠’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화폐 계획을 추진중이다. 달러나 유로화와 1대1로 가치를 고정해 가격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출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랑도 전 부총재는 “페이스북의 디지털화폐 프로젝트가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전세계 통화당국의 생각을 극적으로 바꾼 것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각국 통화당국이 페이스북 시도에 경악한 건 사실 오랫동안 기존 은행권의 약점이라 여겨진 것과 관련이 있다. 경제선진국들에서도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결제과정의 고비용, 타국 송금의 과도한 수수료는 종종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들이다.

외관상 민간기업의 온라인금융 플랫폼과 유사하게 보이는 CBDC가 혁명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국민에 직접 디지털화폐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급진적이다. 미 연준 이사인 라엘 브레이너드는 2019년 “만약 일반인이 스마트폰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 은행 예금을 중앙은행 계좌로 전환할 수 있다면, ‘뱅크런’의 촉매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은행의 예금을 빼 중앙은행에 넣어두면서 은행의 매개기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중앙은행, 예금 먹는 하마 될까

CBDC 이용이 저조하다면 문제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미국인의 은행 예금은 16조8000억달러 규모다. 미국 은행들은 연준에 필요 이상의 지준금을 맡겨두고 있다. 초과지준금 규모는 약 3조3000억달러다. 초기에 은행에서 연준으로 예금이 대거 이동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발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밴더빌트대학 모간 릭스 교수는 “현재 은행의 지준금이 과도한 상황이기에 은행 대출능력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고도 상당한 예금이 연준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중앙은행과 유럽중앙은행(ECB) 연구진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민간의 CBDC 보유량을 제한하자는 것. 하지만 영국중앙은행 부총재를 지낸 폴 터커는 “이는 신뢰성 장벽에 직면할 수 있다”며 “일반적으로 국가나 정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떤 것을 제한하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CBDC가 대중의 인기를 끌 경우 은행의 모든 예금을 빨아들일 수도 있다. 미국의 상황에 대입하면 연준 자산이 현행 8조달러에서 21조5000억달러로 급증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럴 경우 현재 은행이 시중에 제공하고 있는 15조달러 대출은 누군가 대신해야 한다. 연준은 예금으로 받은 돈을 정책금리를 받고 은행에 되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연준이 JP모간체이스나 뱅크오브아메리카와 같은 상업은행에 수조달러를 낮은 금리로 대출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적어도 부유한 국가들 내에선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대출의 원천이 되는 부분지급준비금제가 폐지되는 상황이다. 이는 ‘내로뱅킹’(Narrow banking)이란 개념으로, 은행이 모든 예금을 보증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유동자산을 보유할 것을 요구한다. 1933년 ‘시카고 플랜’으로 제안된 개념이기도 하다. 대공황으로 인해 금융시스템이 대대적으로 파괴됐기 때문이다.

신용의 확장과 돈의 창출 사이의 연관관계를 끊어내면 부분지급준비금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통화이론가 어빙 피셔는 그같은 개념을 ‘금융이 아니라 돈을 국영화하는 것”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내로뱅킹은 밀턴 프리드먼과 제임스 토빈, 하이먼 민스키 등과 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지지한 개념이기도 하다. CBDC 역시 내로뱅킹의 또 다른 부활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내로뱅킹은 금융시스템의 전환을 넘어서는 문제를 갖고 있다. 은행들은 부분지급준비금제를 통해 단기 유동성 예금을 장기 비유동 대출로 바꾼다. 예금을 그냥 놀리기보다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기반으로 활용할 때 경제 전체의 혜택은 막대하다. 안전과 유동성을 선호하는 예금자들과 탄력성을 좋아하는 차용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1930년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진화에서 금융이 띠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창조적 파괴’는 저축자들의 자발적인 금욕이 혁신과 투자를 해방시키는 종잣돈이 되는 과정이다.

만약 각국의 금융당국이 내로뱅킹을 통해 은행의 유동성 창출과 예금-대출의 만기전환을 억제한다면, 경제성장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미국 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피터 피셔 교수는 “만기전환이 경제성장에 유용한 것이라면, 중앙은행은 은행뿐 아니라 모든 금융기관의 활동에 다 개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은행 아닌 다른 금융기관이 기업과 가계에게 대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처럼 신속히 신용을 제공하긴 어렵다. 영국중앙은행 터커 전 부총재는 "은행은 당좌대월을 통해 신속하게 대출을 제공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은행은 즉각 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신용 확장을 통해 신속히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다. 연기금이나 기타 펀드는 불가능하다. 돈이 들어와야 돈을 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은행이 없어지거나 위축되면, 기업들이 위기의 시기 어떻게 신용에 접근할지 알기 어렵다. 지난해 3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미국의 기업 재무팀들은 수십억달러 가치에 해당하는 신용거래를 하룻밤 새 축소했다. 그러자 은행들이 즉각 나섰다. 은행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만약 은행이 없다면 연준이 일일이 개입해야 한다.

영국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머빈 킹은 중앙은행이 담보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과 가계에 직접 대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즉 중앙은행이 은행을 떠받치는 최종대부자가 아니라 실물경제의 전당포가 되라는 것.

하지만 현존 담보시스템은 매우 복잡하다. 다양한 담보의 할인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어렵다. ECB는 재융자 심사가 가능한 담보평가 프레임을 갖고 있다.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스티븐 체케티 교수는 "ECB 시스템은 무엇을 담보로 제시할 수 있는지, 그 할인가치는 얼마인지 알려준다"며 "ECB는 지난 15년 동안 2만5000~3만개에 달하는 담보증권들을 처리했다. 그중 많은 담보가 ECB 요구조건에 맞추기 위해 조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유명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의 계약서가 포함된 담보증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체케티 교수는 "전세계 그 어떤 중앙은행도 그같이 다양한 담보를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각기 다른 담보증권을 각기 다른 시장가치에 맞춰 할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결국 담보평가 시스템은 신용의 가격을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중앙은행의 전당포화는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영국중앙은행 터커 전 부총재는 "화폐의 정치경제 내에, 신용구조 내에 '선택'(choice)이라는 작동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가 선택한 건 부분지급준비금제였다"며 "신용 할당에서 국가나 정부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차라리 금융안정성 문제를 갖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CBDC를 통해 중앙은행에 더 쉽게 접근하게 되면, 중앙은행의 몸집은 더욱 커지게 될 전망이다. 대출 등 신용 제공에서 중앙은행의 직접 개입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은행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국가와 신용할당 사이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느냐에 그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체케티 교수는 "내가 CBDC와 관련해 우려하는 3가지 문제는 금융시스템의 매개기능 상실, 프라이버시 우려, 국경을 초월한 통화 대체"라며 "중국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걱정이 적은 데다 국영은행을 갖고 있고, 자본을 통제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들은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CBDC를 도입할지 여부는 중앙은행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중앙은행 역시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보지 않는다. 연준 제롬 파월 의장은 지난 3월 "CBDC를 추진하기 위해 우리는 의회와 행정부, 국민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법을 해석하기보다 CBDC와 관련한 법을 만들어 추진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다시 말해 공공의 돈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면 대중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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