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업은 왜 미국·중국에 뒤처졌나

2021-06-07 12:17:55 게재

2000년대 초 글로벌 100대기업 41곳에서 15곳으로 감소


유럽 기업들은 한때 미국 기업들과 함께 글로벌 시장을 호령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에 따르면 21세기 초 전세계 100대 상장기업 중 41개가 유럽에 있었다. 오늘날엔 15개에 불과하다.

2000년 전세계 1000대 상장기업들의 총가치 중 약 1/3 정도가 유럽 기업들의 몫이었다. 이익 비중은 1/4이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그 수치는 반토막났다. 유럽은 전세계를 호령하는 기업들의 기반이 아니라 미국의 아마존, 중국의 틱톡과 같은 기업들이 고객을 확보하는 장소다.

노키아와 네슬레, BP와 같은 유럽 기업들은 수십년 동안 시가총액 기준 전세계 10대 기업에 들었다. 이제는 가끔씩 유럽 기업 한 곳이 글로벌 톱 20개 기업에 포함되곤 한다.

유럽의 위상 추락은 일부분 중국의 급부상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은 오히려 글로벌 기업의 선봉장으로서 입지를 강화했다. 유럽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열에서 낙오했다.

유럽인은 거대기업들에 대해 엇갈린 감정을 갖고 있다. 초대형 기업보다 중간 규모 기업들이 여럿 있는 것을 선호한다. 독일의 미텔슈탄트가 대표적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거대기업 부재 흐름이 지속된다면, 유럽 기업계의 쇠락이 원치 않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며 “거대기업들은 혁신에 투자하고, 이는 결국 경제성장을 북돋우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유럽 기업이 고객의 사랑을 받는다. 세계 1위의 명품업체 프랑스 LVMH의 루이비통 핸드백은 전세계 누구나 탐내는 상품이다. 독일 자동차와 스위스 의약품도 전세계적으로 수요가 높다. 그리고 영국-네덜란드 기업 유니레버와 스웨덴 가구기업 이케아가 만든 제품들은 각 가정에서 인기다.

하지만 누가 글로벌 기업경제를 지배하느냐를 들여다보면 유럽과 경쟁하는 미국과 중국의 기업들이 먼저 등장하는 게 사실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정신적 고향인 미국은 초대형 기업과 관련해 수십년 동안 톱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로벌 기업계 풍경을 바꾼 건 아시아의 부상이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거대기업을 낳았다. 전세계 1000대 기업 중 160여개가 중국 기업이다. 20년 동안 4배 많아졌다.

유럽,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선호

2000년 유럽의 100대기업 가치는 4조6000억달러였다. 현재는 8조9000억달러로 늘었다. 같은 기간 미국의 100대기업 가치는 7조4000억달러에서 26조달러로 늘었다. 중국의 100대 기업 가치는 현재 8조8000억달러다.

유럽 기업들이 왜 미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을까. 첫번째 이유는 유럽 기업들의 경영실적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가 많다. 독일 지멘스는 라이벌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보다 경영실적이 더 좋다. 최신 제트비행기를 만드는 것과 관련해 프랑스 에어버스는 미국 경쟁기업 보잉사보다 더 꼼꼼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독일 아디다스보다 미국 나이키가, 스위스 크레디트스위스보다 미국 JP모간체이스가, 프랑스 까르푸보다 미국 월마트가 투자자의 눈길을 더 끄는 게 사실이다. 이익과 매출의 성장과 관련한 미국 기업들의 이점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적되면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유럽이 뒤처진 두번째 이유는 이 지역의 거대 기업들이 지배했던 분야가 보험이나 이동통신인데, 성장의 속도가 빙하처럼 더뎠다는 점이다. 유럽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잘했다고 해도, 전세계가 다른 방향으로 치고 나가는 과정이기에 상황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반면 미국은 소프트웨어와 전자상거래에 깊숙이 진출했다. 글로벌 경제를 재정의하는 산업으로, 수조달러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가 됐다.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량한 신생 스타트업들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테슬라 페이스북과 같은 많은 기업들은 창업자가 경영을 맡을 정도로 충분히 젊다. 반면 유럽에선 오래된 기업들의 이름이 여전히 우세하다.

1000억달러 이상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전세계 142개 상장회사 중 43곳이 지난 반세기 내 창업했다. 27개가 미국 기업, 10개가 중국 기업이다. 유럽 기업은 독일 SAP 한 곳이다. 1972년 창업한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유럽의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10명 중 절반은 선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미국의 경우 10명 중 9명이 직접 창업해 돈을 벌었다.

미국의 스타트업 중 많은 수가 테크 분야에 있다. 주요 대학들과 연구기관, 벤처투자자, 소비자 중심 문화 등이 결합해 실리콘밸리를 탄생시켰다. 유럽의 정책 당국과 기업 경영자들은 이 지점을 가벼이 봤다. 프랑스 또는 독일이 우량한 기술 스타트업들을 대량으로 배출하는 데 실패한 이유다. 미국은 소비자-인터넷 영역에서 유럽을 앞질렀다.

젊고 우량한 스타트업 부재

사실 유럽에 거대 기술기업이 부재한 건 기업가 정신의 결핍 때문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뉴욕대 금융학 부교수인 토마스 필리폰은 “미국이 새로운 기술기업을 계속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유럽은 이에 실패하는 건 실리콘밸리를 넘어서는 문제”라고 말했다.

글로벌 카페 체인은 에스프레소와 바리스타의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시작됐어야 맞다. 하지만 맛없는 커피의 대명사인 아메리카노를 파는 미국의 스타벅스가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친환경 전기차를 만드는 거대기업은 유럽에서 등장했어야 맞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공학에 자부심이 큰 지역인 데다 환경규제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모든 자동체 제조사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한 것만큼 가치를 인정받는 기업은 미국 테슬라다. 영국 또는 스위스의 유명한 금융가들은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자산운용사를 배출하지 못했다. 반면 1988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한 블랙록은 현재 9조달러 이상의 글로벌 투자자금을 굴린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성패는 각자의 경영방식에 좌우된다. 하지만 기업을 글로벌 슈퍼스타로 밀어올리는 데엔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한다. 민간투자자에서 대규모 연기금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본을 끌어모으는 능력이다. 이는 미국에서 매우 중시되지만 유럽에선 종종 무시되는 대목이다.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면 아무리 강력한 지배기업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도 마찬가지다.

향후 전망도 유럽에 유리하지 않다. 차세대 스타트업들을 키우는 자금 파이프라인은 미국과 중국 기업들이 양분하고 있다. 데이터제공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벤처투자자들의 지원으로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유니콘으로 성장한 기업은 모두 661개다. 이런 유니콘 기업 중 78개만 유럽에 있다. 661개 기업의 총가치 2조5000억달러 중 8% 비중이다.

유럽 기업들의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서 종종 등장하는 원인은 유럽 경제다. 유럽 경제는 2000년 이후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유럽의 글로벌 GDP 비중도 점차 하락세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신흥국 시장이 유럽의 자리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부분적 이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20년 동안 절대적 기준에서 유럽 경제는 미국만큼 성장했다. 대략 10조달러를 더했다. 유럽의 인구가 더 많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1인당 GDP는 미국의 2/3 수준이다. 그 비율은 지난 20년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동유럽의 소득 수준이 서유럽에 근접한 덕분이다.

유럽 GDP를 전체로 보는 건 유럽 기업들이 대륙 전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을 가정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다. 이론상 유럽연합(EU)은 기업과 시민에게 단일시장을 제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분만 완공된 건물과 비슷하다. 포르투갈 은행이 핀란드에서 영업을 하는 건 미국 캘리포니아 은행이 텍사스에서 영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언어와 문화적 차이점을 떠나 법적 복잡성이 장벽이 된다. 볼보 회장으로, 대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유럽 '라운드테이블' 대표인 칼-헨릭 스반베리는 "유럽 기업들이 본토시장을 말할 때 대개는 유럽대륙이 아닌 출신국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런 내부적 장벽으로 유럽에선 대륙이 아닌 국가를 단위로 사업하는 중소기업이 많다. 유럽 각국은 각각의 은행과 유틸리티(수도 전기 등 공익사업), 항공사, 슈퍼마켓을 갖고 있다. 유럽 내 이동통신 사업자만 100개가 넘는다. 미국과 중국엔 소수의 사업자가 활동한다. 이들 기업은 유럽 기업들과 달리 규모의 경제를 통해 신속하게 성장할 수 있다.

때문에 유럽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보다 해외시장 확대에 더욱 열을 올린다. 모간스탠리에 따르면 유럽 주요국 기업들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얻는다. 1997년 1/4에서 늘었다. 독일의 거대기업들은 국내에서보다 신흥국에서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한다. 반면 미국 기업들은 매출의 70% 이상을 국내시장에서 얻는다.

유럽 기업들은 기업 환경 측면에서 불리하다고 불평한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친노조 성향이 크다. 이는 자체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노동자들은 더 짧게 일하지만 더 큰 고용 안정을 누린다. 하지만 이는 노동력 단가가 비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의 중소규모 기업들은 글로벌 골리앗들과 경쟁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을 사거나 시험할 수 있고, 저렴한 이율로 돈을 빌리며, 고정비를 보다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중소기업보다 연구개발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 대기업의 결핍은 유럽의 연구개발비(GDP의 2.1%)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은 이유를 말해준다.

안방에서부터 치열한 경쟁 필요

유럽 기업들의 위상이 글로벌 무대에서 하락하고 있지만, 유럽 규제당국의 역할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나 기후변화 대처 측면에선 글로벌 선도자다. EU위원회가 설정한 기준들은 전세계 가장 엄격하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은 유럽 기준을 잣대로 상품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EU가 고안한 기술기업 규제의 상당수가 사실은 외국기업에게만 적용된다. 때문에 점차 타국으로부터 '은밀한 보호주의 정책'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글로벌 룰메이커로서 유럽의 지위가 약화될 수 있다.

유럽 정책당국도 유럽의 상대적인 위상하락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정상참작 요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일부 거대기업들은 유럽에서 국가의 책임영역에 있는 분야에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병원이나 철도 운영사업 등이다. 또 미국의 항공사나 이동통신사 등은 사실상 독점기업으로, 고객으로부터 이익을 갈취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익이나 시가총액만으로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유럽에서도 계획경제 옹호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추세다. 유럽의 민간 영역이 글로벌 대기업과 경쟁을 벌일 우량 기업들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 유럽 기업들을 키우고 외국 경쟁기업을 제한하기 위해 공공부문이 개입하야 한다는 목소리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커지는 추세였다. 팬데믹으로 더욱 증폭됐다.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내세워 외국의 경쟁기업이 유럽 기업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주로 중국을 겨냥한 조치다. 또 '탄소국경세' 논의도 무르익고 있다. 환경규제를 엄격히 지키는 유럽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프랑스와 독일 등 주요국은 유럽의 기업들이 합병을 통해 범유럽 거대기업이 되는 것을 막는 EU 조항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유행했던 '승자 고르기'(picking winners)는 개념도 되살아났다. 산업계 거대기업을 키우기 위해 공공자금을 지원하는 선택과 집중의 일환이다. 특히 녹색기술 분야가 주 대상이다. 프랑스는 과거의 '국가계획위원장' 자리를 되살렸다. 유럽 대륙의 공공펀드들은 스타트업에서 대형 상장사에 이르기까지 녹색사업과 관련한 모든 기업들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유럽 내 많은 이들은 유럽 기업들의 생명줄이 결국 녹색산업에 달렸다고 본다. 유틸리티기업부터 전력메이저들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기업들은 녹색으로 치장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전세계 다른 나라 기업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유럽을 따라야 할 전망이다.

유럽 대학들은 전세계 최정상 수준을 유지한다. 하지만 유럽 역시 인구변동 위기를 겪고 있다. 구대륙은 이름에 걸맞게 늙었다. 15세 미만 인구보다 65세 이상이 더 많다. EU 전역의 포퓰리스트들은 이민을 늘리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는 유럽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일시장을 강화하는 게 가장 좋지만 각국의 정치적 어젠다에서 순위가 밀린 상황이다. 유럽의 로펌이나 소프트웨어 설계기업 등이 대륙을 무대로 자유롭게 사업하도록 해야 하지만 각국으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못 받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치열한 경쟁은 우량 기업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다. 글로벌 거대기업으로 이르는 길은 안방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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