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ASML이 보여준 글로벌 교역 필요성
2021-07-07 12:30:06 게재
NYT "미·중, 홀로 반도체 공급망 못 만들어"
ASML이 만드는 노광장비는 극자외선(EUV)을 이용해 칩 위에 초소형 회로를 그린다. 보다 많은 기능을 실리콘 위에 탑재할 수 있다. 수십년 개발 과정을 거쳐 2017년 양산체제를 갖췄다. 대당 가격은 1억5000만달러를 넘는다. 뉴욕타임스(NYT)는 6일 "이 장비를 해외 고객사에게 수출하는 데엔 40개의 컨테이너와 20대의 트럭, 3기의 보잉747기가 필요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전했다.
ASML 노광장비는 최신 반도체칩을 만드는 데 필수적으로, 지정학적 파문을 던진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9년 네덜란드 정부를 설득해 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바이든 정부도 현재까지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조지타운대 안보·신기술센터 연구자인 윌 헌트는 NYT에 "반도체 제조사들은 이 장비 없이 최신 반도체를 만들 수 없다. ASML이 유일한 장비 제조사"라며 "중국이 이와 비슷한 장비를 생산하려면 최소 10년이 걸린다. 중국 입장에선 좌절스런 상황"이라고 말했다.
ASML 장비는 컴퓨터와 기타 디지털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 칩 공급망에서 사실상 요충지다. 이 장비는 3개 대륙의 기술력으로 개발됐고, 생산되고 있다. 일본과 미국, 독일의 기술과 부품이 쓰인다. NYT는 "글로벌 공급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자체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나라들에게 냉혹한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전했다.
중국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의회는 해외 반도체 제조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500억달러 이상을 지출하는 방안을 논의중이다. 국방부 등 많은 부처에서 대만 반도체 제조사에 대한 의존도, 대만과 중국 인접도 등을 우려한다.
올해 초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미국반도체산업협회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미국이 자체적인 반도체칩 공급망을 만드는 데 최소 1조달러가 든다. 게다가 여기서 만든 칩과 제품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만드는 것에 비해 훨씬 비쌀 전망이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경영학 교수인 윌리 쉬는 "반도체 자체 공급망이라는 목표는 전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완전히 비현실적"이라며 "ASML 기술은 글로벌 교역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한때 무명의 기업이었던 ASML은 이제 시가총액 2850억달러를 넘는다. 미국 투자은행 에버코어ISI의 애널리스트인 C. J. 뮤즈는 "대개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전세계 가장 중요한 기업"이라고 말했다.
1984년 전자대기업 필립스와 또 다른 장비제조사 ASMI가 합작해 ASM리소그래피(ASML)를 만들었다. 리소그래피란 반도체 공정 중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형성하는 기술이다. 빛으로 촬영한 수지를 칩 표면에 고정한 후 화학 처리나 확산 처리한다. 핵심은 짧은 파장의 빛을 사용해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ASML은 이 장비의 최대 공급기업이 됐다. 트랜지스터가 작아질수록 더 강력한 성능을 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ASML은 1997년 극자외선(EUV)으로의 전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통의 리소그래피보다 훨씬 작은 회로를 만들 수 있는 초단파다. ASML은 EUV에 기반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90년대 말부터 80억달러를 투자했다.
개발과정은 말 그대로 글로벌 협력이다. ASML은 독일산 거울을 장착한 선진기계, 레이저로 주석 얼룩을 날리는 미국산 하드웨어, 일본산 화학물과 부품을 조립해 장비를 만든다.
ASML의 CEO 페테르 베닝크는 "창업 초기 돈이 없었다. 때문에 특수한 공급업체들이 가진 혁신제품을 통합했다. 이는 '집단적 지식네트워크'였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하는 것을 따라해서는 승산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제적 협력도 있었다. 1980년대 초 미국과 일본, 유럽의 연구자들이 광원에 대한 급진적 전환을 고민중이었다. 인텔과 미국 반도체 제조사 2곳, 미 에너지부 연구소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ASML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마르틴 반 덴 브링크는 "우리는 1년 이상 협상을 벌인 끝에 1999년 이 연구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벨기에 반도체 연구센터인 'Imec', 또 다른 미국 컨소시엄 세마테크가 동참했다. 이후 ASML은 장비개발 과정에서 인텔과 삼성전자, TSMC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을 끌어들였다.
새로운 광원의 개발과정은 더 까다로웠다. 극자외선의 변덕 때문이었다. 리소그래피 장비는 대개 웨이퍼에 회로를 투사하기 위해 렌즈를 통해 빛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극자외선 파장이 극히 짧은 탓에 유리에 흡수된다. 렌즈는 소용이 없었다. 또 다른 일반적인 도구로 거울이 있지만, 이 역시 같은 문제를 겪었다. 짧은 파장을 더 잘 반영하기 위해선 새로운 리소그래피에 복합 도금이 된 거울을 달아야 했다.
ASML은 175년 전통의 광학기업이자 오랜 협력기업인 독일 자이스그룹에 이를 맡겼다. 자이스는 극자외선을 다루는 2톤 무게의 영사시스템에 여러달 갈고 닦고 코팅한 6개의 특수제작 거울을 달았다.
반덴 브링크는 "하지만 이미지를 재빨리 투사할 만큼 충분한 빛을 만드는 작업도 난관에 부닥쳤다"고 말했다. ASML은 2013년 미 샌디에이고 소재 반도체 기업 '사이머'를 인수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초당 5만번 주석 얼룩을 때리는 고출력 레이의 강한 진동을 이용해 강력한 빛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다.
새로운 시스템엔 '포토마스크'로 불리는 부품도 필요했다. 반도체 직접회로 기판인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도를 그리는 데 사용되는 핵심 부품이다. 또 빛에 노출될 때 이미지를 증착시키는 화학물도 필요했다. 이들은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부문이다.
2017년 출시 이후 삼성전자와 TSMC 등 전세계 고객사들은 약 100대 정도의 ASML EUV장비를 구매했다. TSMC는 이 장비를 활용해 애플의 최신형 아이폰의 프로세서를 만든다. 인텔과 IBM은 'EUV는 반도체 사업에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IBM 선임 부사장 대리오 길은 "인류가 만든 기계 중 가장 정교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2019년부터 ASML 신형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ASML가 재정상 받는 충격은 크지 않다. 다른 나라들의 주문이 많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ASML 전체 매출의 15%는 다른 장비에 대한 중국의 수요에서 나온다.
올해 3월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미의회와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내는 최종보고서에서 "ASML의 다른 장비로도 수출통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회 재정지원을 받는 NSCAI는 중국 등 경쟁국이 인공지능 등 최첨단 기술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됐다.
조지타운대 안보·신기술센터 연구자인 윌 헌트는 "중국이 이미 그같은 장비들을 사용하고 있다. 추가적으로 판매를 금지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이 없다. 오히려 ASML의 재정에 피해를 줄 뿐"이라고 반박했다. ASML 역시 같은 입장이다. CTO 반 덴 브링크는 "상식이 이기는 세상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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